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노동해방’ 전사 박노해, 카메라를 들다

1980년대 초 박노해(59)는 ‘얼굴 없는’ 시인이었다. 그는 노동해방을 갈망했다. 박기평이란 본명 대신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뜻의 필명을 쓴 것도 그 때문이다. 벼린 칼날 위에 선 것 같았던 그의 청년 시절은 고단했다. 그는 2004년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을 맞아 쓴 시 ‘스무 살의 새벽노래’에서 슬픔과 분노로 점철된 젊은 시절을 회고했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다/ 새벽은 이미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는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부으며/ 온몸으로 부르던 새벽/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이었다.’ 그는 이 시대 청년들을 향한 고언(苦言)처럼 ‘스무 살 가슴에 아픔이 없다면/스무 살 가슴에 슬픔도 분노도 없다면/ 그 가슴은 가슴도 아니리’라고 했다.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벌교중학교를 나온 뒤 16세 때 상경해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선린상고를 다닌 박노해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란 한계 상황을 ‘낮은 포복’으로 통과했다. 그에게 세상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노동자만 점점 죽어’(‘모를 이야기들’ 중 일부)가는 곳이었다. 그의 20대는 ‘시커먼 무우짠지처럼/ 피로와 졸음에 절여진 스물일곱 청춘/ 그래도 아침이면 코피 쏟으며 일어나/(…)지옥 같은 전쟁터/ 저주스러운 기계 앞에 꿇어 앉았’(‘졸음’ 중 일부)던 시절이었다. 그런 박노해는 세상 뒤집어지는 혁명을 갈구했다. 그의 무기는 시와 글이었다. 1984년에 펴낸 시집 <노동의 새벽>은 100만 노동자가 들려주는 영혼의 목소리이자 젊은 대학생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는 양심의 북소리였다. 1989년 한국에선 처음으로 사회주의를 공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한 박노해는 무기징역에 처해져 수인(囚人) 생활을 하면서도 시집 <참된 시작>(1993),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를 펴냈다.



1998년 7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끝낸 박노해는 새 삶의 길로 들어섰다. 1980년대를 야수처럼 싸운 그는 소외된 이웃과의 나눔, 참여, 연대, 상생을 모색하며 ‘조용한 반란’을 꿈꿨다.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1999년 4월1일자 17면)에서 “정치적 억압이 모든 것을 숨 막히게 하던 때 그 폭압 구조를 깨뜨리는 정치투쟁이 혁명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세계가 바뀐 만큼 삶의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계 입문 제의도 있었으나 거절했다.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사회운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박노해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됐지만 국가보상금은 거부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2000년 사회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든 그는 낡은 흑백필름 카메라로 아프리카·중동·중남미 등의 가난과 분쟁 현장을 기록했다. 2010년 첫 사진전 ‘라 광야’ ‘나 거기 그들처럼’을 열며 사진작가로 변신한 그가 오는 6월29일까지 서울 부암동 라 카페 갤러리에서 11번째 사진전 ‘카슈미르의 봄’을 열고 있다. 한때 사회변혁의 전위에 섰던 그는 지금 카메라 렌즈를 통해 전 세계 민초들의 삶을 응시하고 있다. 이순(耳順)을 앞둔 그는 아직도 혁명을 꿈꾸고 있을까.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