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12번째 별을 단 박래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활동 160시간.’

유죄였다. 다섯 번의 옥살이 끝에, 징역형·벌금형으로 쌓인 ‘별(전과)’만 12번째다. 세월호 미신고 집회들을 열고 해산에 불응했다고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에게 대표 책임을 물은 것이다. 허탈한 얼굴로 지난 22일 서울중앙지법 법정을 나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55)는 기다리고 있던 아내를 껴안았다. 헐벗은 현장과 법정·감방만 오가는 그를 대신해 생업(초등학생 글쓰기 학원)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온, 그의 표현대로 “조강지처”였다. “나 하나 가둔다고 흔들릴 싸움이 아니다.” 세월호는 그의 인권수첩에 첫 옥중인터뷰(2015년 7월24일 경향신문)와 별 하나를 남겼다.

어김없었다. 세월호 선고에 항소 뜻을 밝힌 다음날, 박래군은 현장에 섰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옛 남일당터. 2009년 경찰특공대 진압에 맞선 망루에서 철거민 5명이 불타 죽고 경찰관 1명이 숨진 용산참사 현장이었다.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이 죽었는데 7년간 빈터로 놓여 있다.” 박래군 추모위원장은 허허벌판을 가리켰다. 뭐가 급해 사람들이 망루에 올라간 지 하루 만에 경찰이 덮치고, 올봄에야 착공 소식이 들리는 ‘재개발의 잔혹사’를 짚은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은 “648일째 4월16일을 살고 있는 저희가 2196일째 1월20일을 사는 사람들 앞에 서니 투정에 불과한 것 같다”고 울먹였다. 그는 2014년 7월22일 경향신문에 쓴 ‘내 인생의 책’에서 한국 사회가 새겨들을 말로 “여기 사람이 있다”(용산)와 “함께 살자”(쌍용차)를 꼽았다. 평생 품고 사는 두 외침이다.





‘朴來群(박래군)(연세).’ 경향신문에 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7년 7월9일. 당시 표기법대로 ‘시국사건 석방자 357명’ 명단에 실린 여덟 글자였다. 박래군은 마음 굳힌 듯 세 토막으로 인생을 말한 지 오래됐다. 1막은 1981년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해 ‘땅강아지’로 연세문학상을 타며 소설가의 꿈을 키운 ‘문청(문학청년)’ 때다. 2막은 학생·노동·인권으로 이어진 운동가의 삶이다. 1988년 6월 “군사파쇼 타도하자”며 몸을 불사른 동생 래전의 죽음은 공장에서 살려던 그를 유가협으로, 다시 인권활동가의 길로 이끈 전환점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재단을 지켜온 그의 삶은 날선 인권 코멘트와 현장 몸짓으로 채워져 있는 ‘대하소설’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박래군의 직업도 그래서 ‘활동가’다.

그가 말하는 ‘인권’과 ‘운동’의 원칙은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도록 돕는 것, 운동도 정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드니까 체력도 체력이지만 판단력도 흐려지고 보수화되더라”는 그의 희망 정년은 60세. 그 후 인생 3막의 꿈은 “잘나가는 연애소설을 쓰는 것”이다. 그가 구속된 지난여름, 사람들은 “우리가 박래군이 되겠다”며 나섰고, 엄기호는 경향신문에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연대해온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그가 바라는 ‘운동 정년’은 5년 남았다. 법원은 그중 4년에 금고형 이상을 다시 확정받으면 실형을 사는 ‘집행유예’ 족쇄를 채웠다. 박래군이 가둬질까. 인권을 가둘 수 있을까.


이기수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