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밀사가 된 ‘기름장어’ 반기문

내 고향 행치마을’이라는 동요가 있다. “충북 음성 행치마을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네/ 소년시절 영어 잘하는 신동이며 외교관을 꿈꾸었던/ 굳은 그 신념 세계 속에 영원한 꽃을 피웠네…” 2007년 음성동요학교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축하하고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일명 ‘반기문 동요’다.

반기문 하면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부드러움이다. 하지만 고향사람들은 굳은 신념을 떠올린다. 동요에 나오듯 반기문은 어려서부터 외교관을 꿈꿨다. 목표를 세운 소년은 외국인 신부나 미국인 기술자들을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했다. 치밀함과 집요함이 외교관 반기문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겉으로 온화해도 속으로 철두철미한 인물”로 기억한다.

1997년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사건은 반기문의 주도면밀함과 능숙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한국, 중국, 필리핀은 황씨의 필리핀 체류연장과 신병인도 문제를 놓고 치열한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극비리에 필리핀을 방문해 민감한 사안을 조율한 ‘밀사’가 바로 반기문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다.(1997년 4월21일자 5면)

반기문은 ‘관운의 사나이’다. YS, DJ, 노무현 3대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 외교통상부 차관, 외교통상부 장관 등 요직을 차례로 거쳤다.




반기문은 이력만큼이나 별명도 많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기름장어’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시절 기자들이 아무리 까다로운 질문을 해도 기분 나쁘지 않게 요리조리 빠져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반반’ 버전은 여러 개다. 외교부 시절에 들은 반반(潘半)은 ‘반기문의 절반만 해도 성공한다’는 뜻이고, 국제 외교가에서 불린 반반(反潘)은 ‘반기문 따라 하다가는 명대로 못 사니 아예 따라 할 생각을 마라’는 뜻이다. 최근에는 대선에 출마할지 안 할지 반반(半半), 여야 어느 쪽으로 나설지 반반(半半)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위아래 누구한테나 신뢰를 얻을 정도로 성실해 ‘특별한 기수가 없다’는 ‘특기’, 고위직이면서도 자잘한 일까지 챙긴다고 해서 붙은 ‘반주사’ ‘반대리’, 온화하지만 속으로 독하다고 해서 외유내강에 강이 하나 더 붙은 ‘외유내강강(外柔內剛剛)’도 있다.

반기문 대망론에는 늘 따라붙는 말이 있다. 권력의지가 약해 보인다는 거다. 정말 그럴까. 그를 보좌한 유엔사무국 의전장은 반기문 평전 추천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겁 없는 사람이다. 가끔 뜻밖의 행동을 하고서 ‘사람이 좀 무식해야 사고를 치지’라고 말하는 호기도 있다.” 한 고향 선배는 “겉은 한없이 부드럽지만 속에는 칼과 쇠가 있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에 ‘박비어천가’를 부르고, ‘충청권 맹주’에게 한 번도 보내지 않던 생일축하 서신을 띄운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반기문은 유엔 수장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긴 여정’이라고 말했다. 교과서에 이름이 실리고 위인 반열에까지 오른 그의 새로운 여정에 세인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기름장어의 여정’에 그칠지 ‘거인의 여정’이 될지 모르지만.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