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춘천거지’ 이외수, 이젠 ‘트위통령’

그는 장발이다.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도 대부분 그랬다. 기자가 이유를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나도 단정히 하는 게 좋아. 그런데 오랜 습관 때문에 머리를 자르면 오히려 불편해졌지. 기도 약해지는 것 같고….” ‘춘천거지’로 알려진 소설가 이외수씨 얘기다.

이외수씨는 1983년 경향신문 연재소설에 도전했다(경향신문 1983년 3월28일 7면). 굳이 도전이라고 말한 이유는 신문연재가 그에게는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도하 각 신문사에서 연재를 부탁했으나 고사했다. 소설에 대한 거부감에서라기보다는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를 넘겨야 하는 틀 속에 묶이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연재소설이 문학성을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도 펜을 잡지 않는 이유였다. 그러던 그가 ‘야성’을 억누르고 연재를 결심했다. 그는 “연재소설에 대한 통념을 바꾸어 보겠다”면서 첫 신문연재소설 <축제의 집>을 집필했다.



그는 자유인이다. 20대 초반 자취를 하면서 석 달씩이나 방세를 못 내 집주인에게 쫓겨나던 때, 그는 외로움과 배고픔 속에서 신춘문예 당선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것만이 구원의 길로 보였기 때문이다. 강원일보에 시가 당선됐다. 그리고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신문사에 취직해 삽화를 그렸다. 그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따뜻한 안방생활을 버리고 다시 울타리를 뛰쳐나왔다.

그에게 영감과 위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준 곳은 춘천이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듯, 어부가 바다를 떠날 수 없듯, 그는 춘천을 떠나 살 수 없었다. 춘천은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이었다. 그는 추위와 외로움에 떨면서도 호수와 안개에 취해 춘천을 떠나지 못했다. 안개를 담고 있는 공지천, 계절마다 이야기를 전하는 나무와 풀, 음악과 담배와 얘기로 가득한 전원다방이 거기에 있었다. 그곳에서 미스 강원 출신의 아내를 만났다.

춘천에 그는 집을 마련했다. 그가 1980년 250만원을 주고 지붕이 새는 작은 집을 샀을 때 그곳은 이미 가족들의 공간이 아니었다. 많은 친구와 문학도들이 찾아왔다. 한 달 평균 300명 안팎의 방문객으로 붐볐다. 설악산 가는 길에, 여행중에 그냥 지날 수 없어서라는 이유를 들며 찾아오는 독자들이었다. 그는 손님들이 항상 먹고 자고 가기 때문에 방 두 개를 늘 비워 놓았다. 당연히 먹을 식량을 대는 것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매달 쌀 두 가마니쯤 들어갔다. 그 비용은 인세나 원고료로 충당했다. 돈을 따로 모을 수는 없었지만 손님과 먹고 지낼 정도는 됐다. 서울에 있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여관방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집에 사람을 들이고 대접하고 보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사람을 좋아하는 병’이 있다는 말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문학청년 시절 다리 밑에서 잠자던 시절에 비하면 부자 아닌가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이젠 150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파워 트위터리안’이다.

그런 이외수씨에게 암이 찾아왔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랐다. 항암치료를 받고 의료진이 불편해할까봐 잘랐다고 한다. 올해 고희를 맞는 그는 투병 중에도 두 권의 책을 썼다. 평생 가는 근심은 없다면서.



박종성 |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