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아파트 주민 대표가 된 ‘애마부인’

배우 김부선씨(55)가 난방비 비리를 폭로한 서울 옥수동 ㅎ아파트에서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됐다. 단독출마해 얻은 찬성표는 88표(59%). “한겨울에도 ‘난방비 0원’인 집이 수두룩하다”면서 2012년 홀로 전단지를 뿌리며 시작한 싸움도 새 국면을 맞았다. 주민들과 얼굴 붉히고, 서류뭉치 내놓으라고 관리소장과 실랑이하며 경찰서·구청 문턱을 숱하게 넘었던 4년. 그는 시민들의 응원 속에 국회 국정감사장에 섰고, 전국 아파트 난방비 전수조사를 이끌어냈다. 올해부터 300가구 이상 아파트단지의 외부회계감사를 의무화시킨 발화점도 그였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난방열사’가 회계장부 열람권도 쥔 주민 대표가 된 것이다.




ㅎ아파트엔 지난 1월 그가 제기한 ‘텃밭 조성비’ 의혹도 물려 있다. 구청에서 지원받아 아파트 공터에 텃밭을 만들겠다며 짠 예산 1000만원에 대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다”고 문제 삼은 것이다. 김씨는 공개적으로 관리비 지출명세서와 통장을 보자고 요구했다. “도둑질도 손발이 안 맞아 못해먹겠다”는 게 그가 전한 당시 관리소장의 넋두리였다. “인수인계 받으러 가니 관리소장과 경리가 갑자기 사퇴했다”는 아파트엔 폭풍전야의 긴장이 감돌고 있다.

‘악다귀 김부선’은 자타 공히 생활운동가의 아이콘이 됐다. 그러나 육박전을 불사하는 좌충우돌엔 유쾌함만 배어 있지는 않다. 아웃사이더(비주류)로 살아온 50줄의 삶이 가볍지 않고 부침도 컸기 때문이다. 그가 경향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3년 10월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로 은막에 데뷔했다는 소식이다. 1979년 ‘미스 제주’에 뽑힌 섬소녀는 여고 졸업 후 상경했다가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패션모델로, 배우로 나섰다. 1985년엔 성애영화의 절정판이던 <애마부인 3>에 픽업됐다. 에로스타로 뜰 때마다 그는 대마초(1983년), 필로폰(1986년)에 얽혀 구속됐다. 훗날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배우라는 이유로 20대 초반에 재벌 2세와 정치인, 권력자의 아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고, 가진 자들의 비겁한 행태를 많이 봤다”고 돌이킨 때다. 1988년엔 유부남인 것을 속인 남자와 만나 딸도 낳았다.

에로배우·대마초·미혼모…. 삶이 뒤엉키던 시절, 그는 감방에서 ‘운동권 대학생’을 만난 게 유일한 보람이었다고 술회한다. 옳은 일에 매달리는 사람을 보며 향락에만 빠져 사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중에 김씨는 쫓기던 그 여학생을 자신의 단칸방에 숨겨주기도 하고, 1989년 “벗는 영화는 그만하겠다”며 여성의전화에서 가정폭력을 주제로 찍은 공익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섰다. 반전이었다.

1997년 서울 한남동에 카페를 차려 세상의 눈에서 멀어졌다가 오랜만에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조연으로 호평받은 2004년. 그는 인생의 올가미였던 대마초는 마약이 아니라는 헌법소원을 냈다. 패했지만 “술보다 위험하지 않다”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까지 앞세워 실명으로 맞선 합법화 싸움이다.


뒤늦게 ‘세상에 눈뜬 애마부인’은 연예계의 성상납·스폰서 풍토를 고발하고, 손배가압류 노란봉투 캠페인에도 앞장섰다. “제인 폰다 같은 사회운동가가 꿈이 됐다”는 그에게 4년 전 난방비가 턱 꽂혔다. 주민 대표의 권세가 힘을 발휘할까. 다시 공이 울렸다.



이기수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