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이해찬, 민청학련 명단서 공천배제 명단으로

경향신문 1975년 2월17일자 7면에는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된 이들 14명의 명단이 나온다. ‘구창완(서울대 문리대) 임성균(서강대) 윤한봉(전남대 농대 4년) 강구철(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3년) 류갑종(전 통일당 소속 국회의원) 방인철(중앙일보 기자) 권오성(서강대) 이해찬(서울대) 이상우(연세대)…’.

1972년 10월 유신과 이듬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 저항이 거세졌다. 박정희 정권은 4월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해 학생들의 수업거부 등 집단행동을 금지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반대 투쟁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한다.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240명을 체포했다.

인혁당 관련자 여정남 등 8명은 1975년 4월9일 대법원에서 상소가 기각된 지 하루도 안돼 사형 집행됐다. ‘사법 살인’이라는 국제적 비난이 일었다. 이들 죄목도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특별조치를 통해 관련자를 석방했다. 당시 풀려난 147명 중에 이해찬이 끼어 있었다.

그는 앞서 3년 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가 10월 유신 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청양에 내려갔다. 아버지 이인용은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나무랐다. 이해찬은 상경해 학생운동 서클에 가입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1년 복역하다가 출소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된 후 2년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이해찬은 재야운동에 투신했고, 1988년 총선 때 서울 관악구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했다. 기호 1번 여당 민주정의당 김종인, 기호 2번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에 이어 기호 3번인 그는 31.2% 득표로 당선됐다. 기호 1번 김종인 후보는 27년 뒤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 대표가 된다.

그해 경향신문 4월28일자 3면에는 제2야당 평민당의 변화에 “원내 진출한 재야인사가 주요 변수”라면서 이름을 나열했다. ‘이상수(중랑갑), 이철용(도봉을), 양성우(양천갑), 이해찬(관악을), 정상용(광주 서구갑), 박석무(무안), 서경원(영광·함평)’ 등이다.

이해찬은 노무현, 이상수와 함께 국회 노동위 3총사로 활약했고, 5·18 광주청문회에서도 스타로 떠오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여당 정책위의장,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를 지냈다. 2012년 민주통합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경쟁 상대인 김한길 후보를 누르고 대표에 당선됐다.

하지만 당내 비주류와 보수 세력은 그를 ‘친노 패권주의 좌장’으로 몰아붙여 왔고, ‘친노 패권’은 더불어민주당 주류를 공격하는 ‘전가의 보도’가 됐다. 경향신문 2016년 3월15일자 1면에서 이해찬은 20대 총선 ‘공천 배제’ 명단에 이름이 오른다. 자신을 처음 구속시킨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된 시대에, 첫 국회의원 선거 때 군사정권 여당 소속 경쟁자의 “정무적 판단에 따라”.



최우규 정치·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