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한국전쟁 60년

(1) 그들의 끝나지 않은 전쟁

ㆍ북으로 간 혈육 … 평생을 괴롭힌 주홍글씨 ‘빨갱이’

김진우·손제민 기자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60년 전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들의 삶에서 한국전쟁은 각종 통계상의 숫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60년 가까운 삶을 지배해온 고통이자 상처였고, 생각과 행동을 제약한 족쇄였다. 북으로 간 가족을 둔 ‘죄’ 때문에 평생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고, 세상에 대해 이유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상이군인’으로 지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후 60년간 ‘또 다른 전쟁’을 치러온 이들 3인의 삶이 말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 납북자 가족 최상동씨

의용군 징집된 아버지, 60년 동안 ‘고통의 그늘’




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혼자 쓸쓸히 돌아올 때였다. 앞서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꼭 아버지 같았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없는 아버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벌써 그 사람을 쫓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어디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기대하면서 집 앞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게 부질없는 기대였음을 깨달았다. 최상동씨(66)는 그날 밤 늦게까지 혼자 서럽게 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최씨의 삶에 ‘아버지의 부재’는 한국전쟁 후 60년 동안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게다가 최씨의 아버지는 ‘자발적 참여’에 의해 조직된다는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멸시에다 “친북세력의 자식 아니냐”는 의심이 더해지면서 최씨의 어린 마음에는 상처가 났다. 평소 내색을 안 하던 동네 아주머니가 홧김에 한 “우리 아들은 국군으로 가서 전사했는데 네놈 집은 빨갱이를 위해 총든 거 아니냐”는 말에 어머니가 가슴을 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고향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는 최씨는 군 제대 후 미련 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건물 야간경비 등 “남들 하기 싫어하는 일만” 했다. 한 번은 지인의 소개로 한 회사를 찾아갔지만 그곳에선 아버지 일을 알고 있었고, “마치 좌익세력 보는 것같이” 최씨를 대했다. 그 회사는 “나중에 연락주겠다”고 말했지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주변에선 “신원조회를 하는 직업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말라”고 말렸다. 최씨는 “아버지 문제로 마음에 상처가 생길 수 있는 일들은 아예 할 생각도 못했다”며 “지난 60년 동안 괜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최씨가 “바로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게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잘못이 없었다. 삼형제 중 장남인 최씨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잡혀가지 않으려고 강릉 집 외양간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잡아가겠다는 말을 전해듣고 마지못해 인민군을 따라갔다. 그때 최씨의 아버지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 의용군으로 징집됐다가 도망쳐온 사람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 소식을 물었지만 “알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 위해 강릉의 각 동사무소로도 편지를 보냈지만 “자료가 없다”는 답장만 받았다. 혹시나 싶어 이산가족 상봉 신청 때도 관할구청에 ‘1번’으로 접수했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6·25납북자가족협의회 창설 때도 적극 나섰다. 하지만 그곳에서 인민군 의용군 가족의 아픔을 호소하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협의회가 주최한 한 세미나에서는 “북한은 의용군에 자원한 사람만 뽑았다”는 주장이 나와 최씨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때 이후로 “괜히 상처만 덧나는 것 같아” 협의회에도 잘 안 나갔다. 다른 의용군 가족들을 만나도 “한 번 마음 다치고 말지, 평생을 마음 아프게 살 수 있느냐”고 했다.



2007년 평생 아버지 소식을 기다렸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최씨는 그때 아버지도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유품들을 모아 어머니 시신과 함께 화장을 했다. 최씨는 “아들이 칠십을 바라보는 마당에 죄스러워서라도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행적이라도 찾았으면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래도 한 가닥 바라는 게 있다. 정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가족 DNA를 조사하는데 이를 납북자 가족들에게도 확대했으면 하는 거다.



최씨는 가족들에겐 내색을 안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슴이 짠해져”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민망해서 부인에게는 “나쁜 꿈을 꿨다”고 얼버무렸지만 잠결에 아버지 생각이 나 흐느낀 적도 있다. “국가가 나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우리처럼 평생 좋지 못한 이미지 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희생은 누가 보상해주냐”고 되묻는 최씨는 얼마 전에 통일부에 질의서를 보냈다고 한다.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과연 책임이 없는가”라고. “북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배우자나 자손들이 평생 불이익을 받고 불행하게 사는데 국가는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냐”고.




■ 상이군인 출신 최모씨
유공자 아닌 참전용사, 울분 토하다 자살 마감



최동수씨(가명)는 ‘상이군인’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몸이 상한 뒤 60년 가까이 ‘상이군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정부로부터 상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실만 인정받아 참전 유공자로만 지정됐을 뿐이다. 최씨는 세상의 무심함에 분노하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하다 지난 2월 79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최씨는 이북 출신으로 해방 후 가족과 함께 강원 홍천 등을 거쳐 충북 충주까지 내려왔다. 특별할 것 없던 그의 삶은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1월 마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갑자기 징집되면서 바뀌었다. 최씨는 입대한 지 반년이 채 안돼 목발을 짚은 채 마을로 돌아왔다. 전투 중에 허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하체를 거의 못쓰는 데다 소학교를 나온 게 전부였던 최씨가 당시 선택할 만한 삶은 별로 없었다.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는 게 시급했던 정부는 ‘상이군인’을 정당하게 대우하거나 적절하게 보상할 여력이 없었다. 최씨는 다른 ‘상이군인들’과 뭉쳐서 여기저기 몰려다녔다. 관공서에 쳐들어가 보상을 해달라고 싸웠다. 주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행패를 부렸다.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기 일쑤였다. 주변에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족들조차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최씨의 동생(72)은 “상이군인 감찰이라고 완장 차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녀서 모두들 ‘상이군인 개××’라고 얼굴을 돌렸고 나도 그랬다”고 말했다. 그는 “형이 원래 고집이 세긴 했지만 다치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주변에서 병신인 것처럼 바라보면 당장 유리병이 깨지고 싸움이 났다”고 술회했다.



최씨는 평생 변변한 직업이라곤 가져본 적이 없어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최씨의 동생은 “상이군인이라고 하면서 여기저기 가서 받은 돈이나 가족들이 도와주는 돈이 전부였다”고 했다. 어쩌면 ‘상이군인’이 그의 직업이었을지도 모른다.



근근이 유지되던 최씨의 삶은 15년 전 함께 지내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난 뒤 더욱 힘겨워졌다. 부상 후유증도 갈수록 심해져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어했다. 참전용사 명예수당 9만원에 장애수당 17만원, 기초생활수급자 생계주거비 33만원 등을 받았지만 생활비와 병원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합병증으로 당뇨까지 생기면서 최씨는 상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는 평소 “나처럼 전쟁에서 다친 사람을 국가가 왜 상이군인으로 보상해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육군본부나 보훈처에 가서 따져야 하니 데려가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최씨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동거해온 방모씨(72)는 “지방보훈처에 상이 국가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편지도 보내고 전화도 했는데 수술한 자료가 없어서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최씨는 ‘자료가 없는 건 자기들 탓 아니냐’고 말하면서 보훈처에 좀 데려다 달라곤 했다”고 전했다.



지난해에도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최씨는 결국 지난 2월 경기 광주시 자택 방에서 전깃줄에 목을 맸다. 방씨는 “베트남 갔다온 사람들은 조금 다쳤어도 혜택을 받는데 자기처럼 진짜 고생한 사람은 제대로 혜택을 못받는다고 한이 맺혔다”면서 “돈도 없고 몸도 갈수록 안 좋아지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까 만날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앉아 있곤 했다”고 말했다.



보훈처에는 최씨의 평소 말과 조금 어긋나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최씨는 2004년 상이 국가유공자를 신청했고 2006년에도 재심의를 요청했다. 신청서에서 최씨는 군 복무시 허리를 다쳐 국군병원에 입원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국방부에 병상일지나 입원환자 등록부가 없어서 ‘비해당’ 처리됐다고 밝혔다. 보훈처 관계자는 “최씨가 그렇게 몸이 불편했고 상이군인으로 활동했다면 1961년 원호청이 생겼을 때 일찌감치 신청을 했을 건데 왜 뒤늦게 신청을 했겠느냐”고 되물었다.



어쩌면 최씨는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는 절박한 심정에 뒤늦게 상이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상이군인’으로 사는 길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60년을 ‘상이군인’으로 산 최씨는 참전 유공자들이 안장되는 이천 국립호국원에 묻혔다. 


 

■ 남로당 가족 석규관씨
외삼촌·형 월북, 연좌제 갇혀 ‘창살 없는 감옥’



 

석규관씨(74)는 지금도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앞을 지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한다. 60년 전, 지금은 헐리고 남아 있지 않은, 그곳의 한 건물에 갇혀서 지낸 악몽 같은 두 달이 떠올라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남녘으로 밀려갔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직후인 1950년 10월 초 열네살 소년은 건장한 청년들에게 다짜고짜 끌려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 문초를 받고 있었다. 그 중 석씨가 가장 어렸다.




“밑도 끝도 없이 ‘태어나서 네가 기억하는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적어라’라고 하더군요. 다 썼더니 다시 쓰라고 해요. 둘의 내용에 차이가 있다며 때리는 겁니다. 무서워서 똥, 오줌을 싸고 기절했어요. 깨어나니 묻더군요. ‘너희 외삼촌 어디 갔느냐’고.”



석씨는 해방 후 외삼촌 심부름을 자주 다녔다. 신문지 사이에 종이를 끼워서 은밀하게 누군가에게 갖다주는 일이었다. 그의 외삼촌 최상린은 남로당원이었다. 전쟁 발발부터 국군의 서울 수복까지 이른바 ‘적 치하 3개월’ 동안 외삼촌은 “서울을 누비며 혁명을 진두지휘했다.” 나중에 한 근·현대사 전공자로부터 외삼촌은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가 전쟁 후 박헌영과 함께 숙청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무서웠지요. 그렇게 사정없이 매질을 당하긴 난생 처음이었어요. 북으로 간 것 말고는 모른다고 해도 그 사람들은 ‘새끼 빨갱이’가 더 독하다며 죽여야 한다고 하더군요.”



함께 끌려온 사람들 대부분이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나이가 어려서인지 풀려났다. 그를 잡아서 고문했던 이들은 경찰이 아니라 ‘서북청년단’이라는 단체였다.



석씨의 부모는 전쟁통에 귀신이 된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오자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네살 터울의 그의 형은 인민군 의용군이 되어 월북한 뒤였다.



그의 이후 삶이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외삼촌과 형의 존재조차 함구한 채 납작 엎드려 살았다. 55년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한 그는 “죽지 말고 살기만 해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에 따라 일절 교내 활동을 하지 않았다. 군 제대 후 울산의 한 정유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 후 그의 아버지 이름이 ‘반혁명분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신문 1면을 장식했고, 그의 인생은 다시 요동쳤다. 경북 봉화군 석포탄광에서 최승준이라는 가명으로 광부 일을 했고,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이 땅에선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며 일본 밀항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집으로 오는 편지와 전화는 죄다 검열했더군요. 연좌제 때문에 받아주는 직장은 없고, 여권이 나오질 않으니 외국에 나갈 수도 없고….”



석씨에게 한국 사회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석씨는 택시 운전을 하며 틈틈이 배운 중국어 실력으로 70~80년대 종로학원 등에서 중국어 강사로 일했다. 뛰어난 언변과 독특한 교수법 덕에 이내 유명 강사가 되었다. 그제야 인생이 좀 풀리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외삼촌과 형 생각을 했다.



“경주 최부자 집 장남으로 태어난 외삼촌은 자신부터 노비들을 풀어주고 땅을 나눠줬어요. 어릴 때 봤던 따뜻하고 정의감에 차 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는 지금이라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면 “왜 그런 분을 숙청했느냐고 묻고 싶다”고 했다.



생사를 알 수 없던 형의 소식을 들은 것은 어느날 대구 대공분실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대구 대공분실은 그의 본적지인 경산 지역을 관할한다고 한다. “석창관씨 알죠? 내일 남산의 대한적십자 사무실에 가보시오.” 전화는 끊어졌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형 이름을 호적에서도 지운 채 숨기고 살아왔는데, 이 놈들은 죄다 알고 있었던 거죠.” 이튿날 그는 북에 있는 형과 화상대화를 했다. 2007년 금강산에서 57년 만에 만난 형제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그는 통일운동 단체에 참여했다. “평생 그렇게 숨어 살았지만 여생만이라도 떳떳하게 살고 싶었소.”



어릴 적 고문의 흔적은 몸에도 남아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10분도 계속 걷지 못한다. 그는 그러한 고문에 대해 최소한 국가로부터 인권침해 인정이라도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진실화해를 위한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너무 늦게 알았다. 위원회 활동이 올해로 종료되기 때문에 석씨는 죽을 때까지 국가의 사과를 받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