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한국전쟁 60년

(2)-1 이산 -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봉의 꿈

ㆍ‘정치’에 휘둘린 이산 상봉… MB정부 들어 한 차례뿐

김진우기자



# “나이가 많다 보니 정말 보고 싶은데, 갈 수도 없고 소식을 들을 수도 없어요. 그렇다고 안달복달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에요. 지금이야 더 하고.” 전화선 너머에서 윤모씨(78)는 허탈한 듯 “허허” 웃기만 했다.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라고도 했다. 평북 영변 출신인 윤씨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밀려내려오자 월남했다. 아내와 갓난 아들을 고향에 두고서였다. “3일만 있으면 다시 돌아온다”고 했던 게 벌써 60년이 됐다.





윤씨는 남에서 새로 결혼해 아들 둘, 딸 둘을 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북에 두고 온 가족 소식이 더욱 듣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하는 눈치다. “접수번호가 10만 몇 번이니 내 순서까지 오기 힘들겠지. 그래도 지난번 금강산에서 마지막 이산가족 상봉할 때는 나이가 있으니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 연락이 없더라고. 무슨 수가 있겠어, 나라에서 해주지 않는 이상. 허허.”



이산가족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60만~70만명으로 추정되는 이산가족의 비원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족과 함께 살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흔히들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적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이산가족 문제는 항상 ‘정치적 문제’에 귀속돼왔다. 지난 60년간 남북은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상대방을 정치적이라고 비난해왔으며, 남북관계가 불안정해질수록 이산가족 문제도 교착 상태를 면치 못했다.



사실 2000년대 들어 남북간 대화가 활발해지면서 이산가족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이산가족 문제가 의제로 오른 당국간 회담이 26차례, 적십자회담이 18차례 개최됐다. 그 결과 2000~2007년 당국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16차례 열리면서 매년 평균 400가족, 2000명 정도가 상봉했다. 여기에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에 이산가족 상봉 확대와 상시적 진행이 명시되면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정상 궤도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후 2년이 넘도록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관계 경색과 함께 좀처럼 활로를 열지 못하고 있다. 이 정부 들어 이산가족 상봉은 195가족 888명이 만난 지난해 추석 상봉이 유일하다. 이마저도 정부의 적극적 의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앞서 방북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면담에 따른 결과였다. 여기에 천안함 사건으로 인한 남북 대결 국면으로 한국전쟁 60년을 앞둔 현재 이산가족 문제는 ‘한가한 얘기’가 돼버렸다. 자연히 윤씨의 경우처럼 상봉의 꿈을 사실상 접는 이산가족도 늘고 있다.



그러나 이산가족 문제는 더 이상 미루기 힘든 ‘시간 싸움’이 되어버렸다. 남북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고령 이산가족들의 사망 및 노환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올 5월말 현재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에 등록된 이산가족 신청자는 12만8123명으로, 이들 가운데 4만3990명(34.4%)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3명 가운데 1명 꼴로 이산가족 상봉 신청만 해놓고 상봉의 꿈을 가슴에 묻은 채 세상을 등진 셈이다. 살아있는 이산가족의 상황도 좋지 않다. 현재 살아있는 상봉신청자 8만4133명 가운데 90세 이상이 4745명(5.6%), 80~89세 2만9572명(35.2%), 70~79세 3만715명(36.5%)이다. 70세 이상이 77.3%에 달해 앞으로 사망자는 급속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당국 차원의 상봉은 대면상봉이 3573가족·1만7100명, 화상상봉이 557가족·3748명으로 총 4130가족·2만848명이다. 여기에 1990년대 이후 민간 차원의 상봉 1731가족·3358명까지 더하면 모두 5861가족 2만4206명이다. 이는 이산가족이 남북 양측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남한의 상봉 신청자 12만8116명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설혹 상봉이 재개돼 남측 이산가족이 매년 1000명 정도씩 북측 가족들과 상봉한다고 하더라도 생존 신청자 8만여명이 상봉하는 데 80년이 넘게 걸린다. 특히 80세 이상 신청자 3만4829명이 우선 상봉하는 데만 30년이 넘게 걸리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 남북 관계를 감안하면 이들이 상봉을 이루게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고 하겠다.



“이산가족 상봉이 조속히 그리고 상시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유종하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이 되어야 할 교류방식으로 ‘생사확인’이 꼽힌다. 이를 위해 남측의 상봉 신청자와 관련된 북측 이산가족의 신원을 최대한 신속·정확하게 확보하기 위해 북한 행정전산망의 현대화사업을 지원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한성대 김귀옥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 정보화시스템 구축을 시도했지만 지금은 중단된 상태”라며 “북측 이산가족의 생사와 소재지만 파악되면 이산가족 상봉을 상시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된다”고 말했다. 단발성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같은 사업보다는, 서신 교환 같은 사업이라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열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인도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의 분리 방안을 제시한다. 이산가족 교류 사업을 정치적 상황과 분리하는 원칙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통일부도 그간 이산가족 교류와 관련해 ‘정치상황과 관계없는 추진’, ‘고령 이산가족을 위한 상봉 방식 다양화’, ‘전면적 생사확인 등 근본적 문제 해결’ 등의 원칙을 밝혀왔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김귀옥 교수는 “이산가족은 전쟁과 분단구조의 희생양이라는 공동의 자각이 중요하다”며 “이산가족을 남북한 당국간 대화 과정에서 ‘대국민 차원’으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이고 비정치적인 문제로 풀어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전화 인터뷰 말미에 윤씨는 “빨갱이들은 지독하다. 겉과 속이 달라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니 가족을 만나도 서먹서먹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윤씨는 “그래도 살아있다면 한 번이라도 만나봐야 할 것 아니냐”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