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한국전쟁 60년

(2)-2 ‘또다른 이산’ 재일조선인

ㆍ분단 비극 고스란히 투영
ㆍ‘북송’으로 이중·삼중 고통

김진우기자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대개 ‘납북자’나 ‘월남인’ 가족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에는 이들 외에도 월북인, 국군·인민군 미귀환 포로, 미귀환 공작원, 정전 이후 북한이탈주민 등 당사자와 가족을 포함한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재외 이산가족도 있다.



특히 재일조선인은 전쟁과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이산가족’이다. 남북의 분단이 재일조선인 사회에도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은 북한의 전쟁도발에 반대하고 642명이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재일조선인연맹을 배경으로 한 이들은 반전평화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북한행 선박 객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재일조선인들.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다룬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교수의 저서 <북한행 엑소더스>에 수록된 사진.





한국전쟁 이후 재일조선인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 교류를 했고, 정체성 역시 남과 북으로 구분되어 파악됐다. 특히 많은 한국인들은 ‘조선적(籍)’ 재일조선인을 ‘친북 인사’ ‘빨갱이’로 봤다. 이 같은 인식을 강화하고, ‘또 다른 이산’을 만들어낸 중요한 사건이 1959년 시작된 ‘재일동포 귀국운동’, 이른바 ‘북송’이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교수의 저서 <북한행 엑소더스>에 따르면 59년부터 84년까지 9만3340명의 재일조선인이 북송선을 탔다.



일본의 패전 후 외국인으로 차별받던 재일조선인에게 ‘귀국’은 하나의 선택지였다. 당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타고 호황을 누렸지만, 재일조선인 태반은 곤궁을 면치 못했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에 따르면 52년 재일조선인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무직자 비율이 62%였고, 취업자도 일용노동자가 가장 많았다. 여기에 당시 남한은 가난했고, 재일조선인을 ‘빨갱이’로 규정했다. 반면 북한은 공업화가 진행됐고, 여러 개혁적인 사회·교육환경 등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북송’은 재일조선인들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줬다. 52년 당시 재일조선인 1세의 90% 이상이 남한지역을 고향으로 두고 있었다는 조사를 감안하면 북송으로 인해 남한 가족·친지들과의 교류는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원거주지 일본의 가족들과도 교류가 제한됐다. 남한의 이산가족들은 연좌제에 대한 공포로 일본이나 북한에 거주하는 이산가족들을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북송된 재일조선인은 1990년대 이래로 탈북자가 되어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김귀옥 교수에 따르면 3월말 현재 재일조선인 출신 탈북자가 약 89명이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 의해 2006년까지 17차례에 걸쳐 총련계 재일조선인들의 모국방문사업이 추진됐지만 방문자는 1100여명에 불과했다. 김 교수는 “북송된 가족조차 제대로 못 만나고 있는 민단계 동포들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며 “북측과 총련, 민단 간에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느슨한 조직을 구성해 생사확인부터 시작하고 국내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