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1) 볼펜과 필기구

윤민용 기자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한동안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연필칼로 가지런하게 연필을 깎아주셨다.
갓 학교에 들어간 어린아이가 칼을 다루는 일은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얼마 안가 아버지가 ‘샤파’를 사다주시면서 어머니의 연필깎기는 중단됐다. 샤파에 연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드르륵 하며 연필이 깎이는 게 신기해서 계속 돌리다가 연필이 짤막해진 적도 있었다.
어른들은 연필심이 너무 날카로우면 찔릴 위험이 있다고 했지만 예리하게 잘 깎인 연필을 가지런히 줄맞춰 필통에 넣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탐나는 필기구는 따로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쓰는 볼펜과 만년필이었다.
한번 잡아볼라치면 글씨도 잘 못쓰는 어린애가 함부로 볼펜을 쓰면 글씨체가 망가진다고 혼이 났다. 더 이상 손에 쥘 수 없을 정도로 연필이 작아지면 그제야 볼펜을 만져 볼 수 있었다. 몽당연필깍지로 변신한 후에야 말이다.


1960년대 볼펜 판매경쟁이 거세지면서 볼펜광고가 신문 1면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미지는 60년대 후반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광고.



볼펜의 대명사는 뭐니뭐니해도 ‘모나미 153볼펜’이다. 1963년 5월1일 탄생한 이 볼펜은 국산 최초의 볼펜이자 현재까지도 팔리는 장수상품이다.
프랑스어로 내 친구라는 뜻의 모나미(Mon Ami) 볼펜은 0.7㎜ 두께로, 지금도 검정·빨강·파랑의 3색 잉크로 생산된다. 더욱 특기할 사실은 47년 전 초기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육각기둥의 몸체에 볼펜촉 덮개와 스프링, 잉크심, 조작노크 등 5개 부품으로 이뤄진 볼펜의 디자인은 단순하면서도 기능적이다.

잉크를 묻혀 철필을 쓰던 사람들은 국산 볼펜이 생산되자 열광했다. 출시 당시 15원이던 볼펜은 문방구는 물론이거니와 거리의 판자집, 행상 등에서도 팔렸다. 66년 신문기사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하루 30만자루가 팔렸다.
모나미 볼펜이 크게 인기를 얻자 개발사인 광신화학은 아예 67년 모나미화학 공업사로 이름을 바꿨다.

서구에서도 볼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오랫동안 깃털 등에 잉크를 묻혀 쓰다가 19세기 후반 잉크를 저장하는 카트리지가 들어있는 만년필이 발명됐다. 휴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잉크가 번지는 등의 문제로 사람들은 이를 대체할 필기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볼펜은 근대 화학과 정밀공업의 산물이다. 볼펜의 원형은 100여년 전 탄생했지만 대중화는 헝가리의 신문편집자 라스즐로 비로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화학자인 형의 도움을 받아 빨리 마르면서도 점성이 있는 잉크를 개발했고 1938년 영국에 특허권을 등록했다.
1940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형제는 볼펜회사를 만들어 ‘비로메’라는 이름의 볼펜을 팔기 시작했다. 1945년 미국의 필기구회사들이 볼펜의 대량생산에 뛰어들면서 비로소 볼펜은 대중화됐다.

국내에 볼펜이 소개된 건 광복 이후 들어온 미군에 의해서다.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들이 볼펜을 쓰면서 널리 소개됐다.

특수합금으로 만든 볼펜심과 잉크를 만드는 기술을 국산화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60년대에는 볼펜촉을 밀수입하다 적발된 이들에 관한 신문기사가 종종 실렸다.
모나미 볼펜의 성공 이후에는 국내 볼펜생산업체가 10여개 생겨서 판매경쟁이 치열해졌다. 신문 1면에 볼펜광고가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볼펜에 대한 저항 또한 있었다. 특히 글을 쓰는 문인들 중에는 펜을 고집하는 이들이 많았다. 볼펜으로 쓴 원고는 정성이 깃들여있지 않다며 문하생의 원고를 되돌려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볼펜의 잉크가 고르게 나오지 않아 70년대 문단 데뷔 이후부터 철필을 고집한 소설가 김주영씨는 “철필에 잉크를 묻혀 종이로 옮기는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을 가다듬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컴퓨터 키보드가 볼펜을 대신하는 디지털 시대, 이따금 손에 연필이나 만년필을 쥐고 글씨를 쓸 때면 단순한 행위 속에 깃든 삶의 위엄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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