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9) 커피

김후남 기자 hoo@kyunghyang.com


1970년대 동서식품이 ‘맥스웰하우스’라는 상표로 인스턴트커피를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하기 전까지 커피는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다.

엄마들은 커피를 식구들 모르게 꼭꼭 숨겨 놨다가 귀한 손님이 오실 때만 한 잔씩 타 드렸다. 손님이 떠나고 나면 아이들은 커피잔 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거나 커피잔을 코에다 갖다 대고 아직 가시지 않은 커피 냄새를 맡았다.

예쁜 잔에 다소곳이 담겨 우아하고 그윽하게 향기를 피워올리는 커피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커피가 없는 현대인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침이면 커피를 마셔야 눈이 뜨이고, 하루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마신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무언가 마무리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처럼 커피는 현대 한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래된 시기는 19세기 후반, 개화와 근대의 바람을 타고 커피향도 함께 실려왔다.
서양 물을 먹은 신식 멋쟁이들이 홀짝이는 커피는 말 그대로 개화와 근대의 상징이었다. 최초의 한국인 커피 애호가는 고종 황제였다.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처음 커피 맛을 본 고종은 환궁을 한 뒤에도 커피를 즐겼다.
덕수궁 안에 서양식 건물 ‘정관헌’을 지어놓고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신 마니아였다. 소설가 김탁환은 커피에 빠진 고종 황제를 모티브로 삼아 <노서아 가비>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무용가이자 1920~30년대에 활약했던 모던 걸 최승희씨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
당시 커피는 개화와 문명의 상징으로 신여성들의 기호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커피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해방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다.

 커피를 잘 알지 못하던 보통사람들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갈색 가루’를 접하게 됐다. 가루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손으로 찍어 맛보기도 하고, 가마솥 가득 물을 붓고 끓여 대접으로 마시다가 구토와 설사, 불면증으로 애를 먹기도 했다.
이 때문에 커피는 일부 사람들에게 뱃속의 회를 녹이는 회충약, 잠을 쫓아주는 ‘공부약’으로 음용되기도 했다.

아무 맛도 없이 쓰기만 한 커피에 얼굴을 찡그리던 사람들도 설탕과 크림(프림)을 넣은 커피에는 얼굴을 활짝 폈다. 아니, 열광했다. 이 무렵 다방에서는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들에게 설탕과 프림을 어떻게 넣느냐고 묻는 게 일이었다.

1976년 커피와 크림 그리고 설탕을 한국인의 입맛에 알맞게 배합한 1회용 인스턴트커피 ‘커피믹스’가 나왔다.

커피믹스의 등장은 커피 대중화를 이끈 혁명이었다. 커피를 마실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도 손님이 오면 대접한다며, 한 봉지에 45원 하는 커피믹스를 한두 개 사곤 했다. 커피믹스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커피 입맛을 통일했다.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는 80년대 중반 이후 전환점을 맞았다. 수입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원두커피의 맛과 미국식 테이크아웃 커피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99년 미국식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처음으로 서울 이화여대 앞에 문을 열었다.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은 전통적 ‘다방’을 밀어내고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원두를 직접 볶아 손으로 커피를 내리는 ‘로스터리 카페’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4000원짜리 점심을 먹은 뒤 후식으로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되었다.

‘다방 커피’에 익숙한 중·장년층엔 커피전문점의 복잡한 메뉴판이 낯설기만 하다. 노래방에 가서 신곡을 따라부르지 못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하지만 커피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마시는 이의 이성과 영혼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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