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0) 식모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순희 언니.
<지붕 뚫고 하이킥>이란 시트콤을 보다 언니 생각이 났어요. 그 드라마엔 빚 때문에 아빠를 따라 산골로 들어가 살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세경이란 예쁜 소녀가 나와요. 뻥튀기 아저씨도 ‘곡물팽창업자’로 불리는 요즘, 식모란 원색적 단어가 약간 거북스러웠지만 ‘밥엄마’란 원뜻은 그리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처음 기억하는 세상 풍경은 언니의 등에 업혀서 본 모습이에요. 언니 등에 업혀 본 동네 사람들, 골목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언니는 6남매의 밥상 차리기만도 벅찼지만 늘 막내인 날 업고 엄마를 도와 청소와 빨래도 했죠.
진공청소기도 세탁기도 없던 시절, 언니는 한겨울에 찬물에 걸레를 빨면서도 구시렁대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외가 친척이 우리집에 소개해준 언니는 그때 열다섯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에 보따리 하나 들고 우리집에 왔죠.
몇 푼인지 모르지만 빈약한 게 틀림없던 언니의 월급은 고스란히 시골 집에 보내져 언니네 오빠의 등록금과 아버지의 약값으로 쓰인다고 했어요. 교복 입은 오빠 사진을 보여주며 “울 오빠 대학도 내가 보내줄란다”던 언니의 표정엔 자부심이 가득했죠.
그 자긍심으로 언니는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을 견뎌낼 수 있었을 거예요. 2년 후에 언니가 쌀집 아저씨 소개로 버스 차장이 되겠다고 우리 집을 떠날 때 얼마나 슬펐던지요.
바쁜 엄마 대신에 밥도 먹여주고, 헝겊인형도 만들어주고, 언제나 포근한 등을 빌려주던 언니의 부재는 한동안 어린 가슴에 상처로 남았습니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식모살이하는 세경이 빨래하는 모습.



언니 이후로도 영자, 복순, 봉란 등등 숱한 식모 언니들이 우리집에 머물다 갔습니다. 중국집 배달아저씨와 바람나서 엄마 반지를 훔쳐 달아났던 언니, 대학생과 펜팔하며 우리 언니 사진을 보내 그 대학생이 우리집에 찾아오게 만들었던 언니, 엄마의 중매로 결혼해 쌍둥이를 낳은 언니….
이름과 얼굴은 달라도 언니들의 환경은 비슷했어요.

1960~70년대 빈궁한 시골에서 입 하나 덜려고, 혹은 단돈 몇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언니들은 희망을 품고 서울로 왔죠. 어떤 언니는 공장에 가고, 또 다른 언니들은 친지나 직업소개소를 통해 식모란 직업을 구했습니다.
당시엔 식모 월급이 많지 않아 웬만한 중산층은 식모를 두었고, 새로 지은 아파트 부엌 옆의 자그마한 방을 ‘식모 방’이라 부를 만큼 식모는 또다른 가족이었어요. 코미디언 구봉서가 주연을 맡은 <남자 식모>란 영화도 있을 만큼 친근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니들만 있는 건 아니었죠. 아줌마들도 많았어요. ‘쉼터’도 없던 시절에 남편의 구타를 피해, 혹은 생활고를 해결하려고 아이 엄마들도 시간제로 오는 파출부가 아닌 입주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남편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두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우리 집에서 식모로 있던 산청댁은 폭행 후유증인 두통 때문에 매일 ‘명랑’이란 약을 먹었어요.
음식 솜씨가 좋아 식혜며 별식을 자주 만들어주던 산청댁의 큰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그때 하필 우리 오빠가 대학 시험에 떨어져 우리 가족은 마음껏 축하도 못해줬지요.

이젠 대한민국 국적의 식모들은 찾기가 어렵답니다. 한국 언니와 아줌마들은 주유소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래방 도우미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습니다. 대신 중국에서 온 ‘이모’들이 밥을 챙겨주고 아이에게 조금 낯선 발음으로 동화책을 읽어줍니다.

언니, 얼마 전 환갑을 앞둔 사촌언니가 “식모살이 하러 미국 간다”고 하더군요.
유학간 딸이 손자를 낳아 산후조리와 살림을 도와주러 가는 친정 엄마, 시골에 남편을 두고 홀로 서울 와서 바쁜 며느리 대신 손자를 돌보는 시어머니의 삶을 ‘21세기판 식모살이’라고 한답니다.

순희 언니, 나도 식모살이 할 날이 다가옵니다. 직장 때문에 소홀했던 딸에게 항상 “네 자식은 내가 키워줄게”라고 약속했거든요. 내가 언니처럼 훌륭한 밥엄마가 될 자신은 없어, 벌써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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