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8) 장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장날이다. 새벽, 아버지와 어머니 두런거리는 소리. “송아지 아침 잘 멕였구?”

어머니가 벌써 쇠죽을 쑤었는지 아랫목이 슬슬 달아오른다. 서울로 공부하러 간 큰형에게 보내려고 송아지를 팔러나갈 참이다. 어미소를 팔아야 돈이 아귀가 맞겠지만, 마을에 일소 있는 집이 몇 안 돼 마을일꾼으로 일할 어미소는 함부로 내다 팔 수도 없다.
아쉬운 대로 송아지를 팔아 급한 돈을 끄기로 했다. 어머니도 내다 팔 것을 챙기느라 부스럭거리고, 진즉 잠에서 깬 아이는 이불 속에서 송아지처럼 눈만 껌뻑였다.

읍면(邑面)을 지나 리(里)를 거쳐 마을이름에 ‘마을’ ‘말’ ‘뜰’ ‘뜸’이 붙어 있는 곳은 대개 10여 가구가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여 살았다. 다랑이논 물꼬 보고 아침 먹고, 콩밭·고추밭 김 매다 점심, 해 떨어지면 얼른 저녁 챙겨먹고 석유 아끼려 호롱불 끄고 누우면 하루가 갔다.
혼례나 회갑 같이 잔치가 벌어지거나 초상 같은 애사라도 생겨야 마을이 잠시 들썩일 뿐, 그나마 잔치 뒤끝의 흥도 채 하루 지나지 않아 먼지처럼 시렁에 내려앉는 생활이었다. 그날이 그날인 시골사람들은 특별한 일도 없이 장날을 기다렸다.

더구나 장날은 돈이 귀한 시골마을에서는 돈을 사오는 날이다. 쌀을 돈 주고 사오는 것을 ‘쌀 팔아 온다’고 하거나 쌀을 파는 것을 ‘돈 사온다’고 하는 언어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돈이 귀했기 때문이다.

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노천명의 시 ‘장날’에도 ‘대추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먹고사는 것이야 길러서 먹으면 된다지만 아이들 월사금을 내거나 생활용품을 장만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추곡 수매나 해야 돈을 만져볼 수 있었으니 장날은 시골사람들이 소소한 푼돈을 마련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장은 장시, 장, 전(廛), 시장으로 불렸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정기 시장인 장시는 주로 지방에 많았다.
시골의 농산품, 특산품과 도시에서 생산된 공산품의 교역이 이뤄졌다. 특별한 생산품이 없는 마을에서는 장작을 지게로 져 내오기도 했고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오기도 했다.
5일장, 10일장, 보름장, 3일장이 있었는데 5일마다 열리는 5일장이 가장 많아 ‘5일장’이 정기시장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장은 대개 읍·면 소재지 천변이나 공터에서 열렸는데 마땅한 곳이 없으면 상설시장 길가에 시골 아낙들이 모여 앉아 채소 보따리를 끌러놓고 팔았다.

장날은 시골 아이들에겐 잔칫날이나 다름없었다.

장에 가면 신기한 볼거리들이 많았다. 재수가 좋으면 튀밥장수 할아버지에게 튀밥 한 줌 얻어먹을 수 있었고, 술이 얼근한 아버지에게 동전 한 닢 얻어 눈깔사탕을 사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 탓에 ‘뻥이오’ 소리가 나면 아이들은 튀밥장수 할아버지 주위로 몰려들었다. 더 재수가 좋으면 무료극장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극장이라고 현수막은 달아놨지만 약간의 재담과 노래를 보여주고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 극장’이지만, 그게 어딘가.
‘애들은 가라’로 시작되는 ‘몸보신제’ 장수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앞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5일장은 일제시대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상설시장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조선시대에도 광화문과 남대문, 동대문에 이르는 거리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이라는 상설시장이 있었다.
1914년 일제가 ‘시장규칙’을 공포해 공설시장을 곳곳에 세웠다. 5일장도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상설점포를 열면서 점차 상설시장으로 변모했다.

장이 파할 때가 가까워졌다. 아버지는 송아지 판 것이 못내 아쉬운지 장터 국밥집에서 이웃마을 동무들과 막걸리를 연방 들이켰다. 어머니는 팔리지 않은 채소와 곡물을 거두어 ‘비린내 거리’와 바꿀 수 있는지 장터를 두리번거리며 다녔다.
공산품은 힘들겠지만 그날 팔지 못하면 상하는 농수산품은 파는 사람끼리 말만 잘 맞추면 곧잘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사 준 양말 한 켤레를 손에 꼭 쥔 채, 팔려간 송아지와 서울 간 큰형과 장에 따라 나오느라 해놓지 못한 숙제를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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