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6) 미제 아줌마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아줌마’만 떴다 하면 동네엔 아연 활기가 돌았다. 주부들은 아줌마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주위에 모여앉아 ‘별세계’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짭조름한 스팸과 리즈 크래커, 알록달록한 참스 캔디(먹고 난 캔디 깡통은 아버지의 재떨이로 쓰였다), 오렌지주스 가루 탱은 아이들을 유혹했고 엄마는 아이보리 비누와 레블론 샴푸, 맥스팩터 파운데이션, 손 튼 데 즉효던 바셀린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내들은 남편을 위한 ‘당근’도 쇼핑 리스트에서 빼놓지 않았다. 애프터셰이브 ‘올드 스파이스’와 맥스웰 커피, 커피크림 ‘카네이션 커피메이트’ 등이었다. 이른바 ‘미제(美製) 아줌마’들은 움직이는 면세점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군 부대 구내매점(PX)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떼어다 팔던 미제 아줌마들이 ‘활약’한 시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다.
당시 국산품의 질은 조악했던 반면 산업화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의 소비욕구는 높았기 때문이다. 미국을 자유와 풍요의 상징으로 바라보던 맹목적·정서적 선망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미제 아줌마들은 정부의 단속에 민감했다. 아줌마들은 대략 한 달에 한 번꼴로 출현했지만, 가끔은 몇달씩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속이 심할 때 ‘경거망동’했다간 가방을 통째로 압수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골목 안 집집마다 ‘비누가 떨어졌네, 바를 크림이 없네, 커피가 먹고 싶네…’ 등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1968년 남대문시장 내에서 외제상품을 사고팔던 도깨비시장 풍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83년부터 수입 자유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미제 아줌마들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미제 사랑’마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90년대 초반에도 이런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한국의 외제상품 암시장인 소위 도깨비시장이 번창하고 있어 미국 기업들의 대한 상품판매 확대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고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19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은 스팸 등 미제 물건을 사용하는 것을 신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매일경제 1991년 7월20일)

남대문 ‘도깨비시장’은 7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미군 부대나 외국에서 배로 몰래 외제품을 들여와 팔았기 때문에 아침·점심·저녁 때마다 물건가격이 달랐다고 한다.
도깨비시장이라는 표현의 유래에 대해선 가격이 이처럼 시시때때로 바뀌어서 붙었다는 설과, 이상하고 신기한 물건이 많아서 붙었다는 설 등으로 엇갈린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의 인기는 80년대 중반 이후 서서히 저물어간다.
국산제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품질이 향상된 데다,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일본과 중국에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미국인들조차 삼성 휴대전화를 쓰고, 도요타나 혼다 자동차를 몬다. 한국의 명품족도 미국산 대신 프랑스산 샤넬 슈트와 루이 뷔통 가방, 이탈리아산 페라가모 구두에 열광한다.

이제 한국인들은 미제 사랑을 접은 것일까.

눈에 보이는 부분에선 그럴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에선 애정이 더 짙어졌다. 미국 영화, 미국 노래, 미국 드라마는 상한가다. 박찬호·박세리 선수 덕분에 미국 프로야구와 골프에까지 눈을 떴다.

그리고 이 모두의 바닥에 흐르는 건 ‘미국말’과 미국 교육·제도에 대한 짝사랑이다. 같은 영어라도 영국이나 호주·뉴질랜드 영어는 대접받지 못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쓰이는 북미 영어만 우대받는다.
대학에서도 유럽이나 일본 유학파는 입지가 좁아지고 미국 유학파는 대를 이어가며 주류를 놓지 않는다. 정부는 미국 스스로 잘못된 것이라고 고백한 의료제도를 뒤늦게 흉내내겠다고 한다.

우리는 여전히 ‘미제 아줌마’의 보따리를 침 흘리며 바라보던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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