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4) 달력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01/10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기일(忌日)이나 생일은 음력으로 쇴다. 여성들은 시집 가면 시댁 식구의 음력 생일과 기일을 물려받아 챙겨야 했다.
하지만 양력으로 생활하다보니 음력은 잊고 살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특히 맏며느리는 달력에서 음력을 찾아 빨간 동그라미를 쳐놓거나 ‘할아버님 제삿날’ ‘아버님 생신’이라고 적어놓고서야 새해를 맞았다.

달력은 70년대 말까지도 흔한 물건이 아니어서 새해 선물 노릇을 톡톡히 했다.
번듯한 회사라도 다녀야 회사 달력을 타오지, 그렇지 않으면 은행이나 업소에서 주는 달력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하루살이 서민들에게 거래 은행과 업소가 있을 리 만무하니 달력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서는 구경조차 힘든 게 달력이어서 설 귀성객들은 부모님 선물로 달력을 돌돌 말아 싸가지고 갔다.




달력 장수들은 길거리에 달력을 전시해 놓고 팔았다.
1986년 11월 서울 거리에서 사람들이 87년도 달력을 고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눈치 빠른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은 연말이면 가가호호 지역구 유권자 가정에 달력을 뿌렸다.
경비를 줄이려 반지(A2용지 크기) 한 장에 1년 365일을 빼곡히 채워놓은, 말하자면 연력(年曆)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게 주된 목적인지라 근엄한 정치인의 사진이 한가운데를 차지했고 날짜들은 주변에 깨알처럼 박혀있었다.
달력을 구하지 못한 서민들은 그것도 감지덕지, 벽에 붙여놓고 일년 열두달 보기 싫든 좋든 정치인들과 대면해야 했다. 관공서에 들르면 꼭 마주치던 대통령 얼굴처럼.

달력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쇄소 달력’을 샀다.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찍어 업소용으로 납품하고 남은 것들은 달력장수 손에 넘겨져 길거리로 나왔다. 달력장수들은 여성모델 사진이 실린 것들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했다. 사지 않는 이들에게도 좋은 눈요깃감이었다.
저작권료가 문제였겠지만 인쇄소 달력엔 여성이나 풍경을 찍은 사진, 한국화가 주로 쓰였다. 6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은 문희·남정임·윤정희씨 같은 유명 배우가 나온 달력이 인기 있었다.
비키니 차림의 달력이 한복 차림 달력과 섞여 거리에 걸리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다.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日曆)은 더 귀했다.
16절지(A4용지) 크기의 흰 습자지에 하루를 담은 일력은, 음력은 물론 갑자·을축 간지까지 큰 글씨로 적고 빨간 태극무늬로 국경일을 표시했다.
날짜가 주먹보다 커 노인들이 좋아했다. 노인들은 보들보들한 습자지로 만들어진-뻣뻣한 종이를 쓰면 두꺼워지니까-일력을 매일 떼어놨다 봉초(담뱃잎을 썰어 놓은 것으로 담뱃대에 넣어 피운다) 마는 데 썼다.
화장지가 귀하디 귀한 때라 화장지로 쓰려고 가족들이 다투어 떼어갔다. 그 때문에 일력의 날짜는 하루 이틀 앞서가기 일쑤였다.

천체 운행의 기록인 달력은 절기와 재해를 예측하고 대비하게 한다는 점에서 지배자들의 권력이자 의무였다.

사실(史實) 여부를 떠나, TV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과 미실도 일식을 예측하는 역법을 가지고 권력을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의 새 황제가 자신의 연호를 쓰고 서양의 7월(July)과 8월(August)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을 따온 것도 달력과 권력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고유의 역법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조 세종 24년(1442년)의 일이다. 이전에는 중국의 역법을 따랐는데 위도와 경도가 중국과 달라 오차가 많이 났다.

세종은 정인지, 이순지 등 학자를 동원해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을 만들었다. 칠정은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으로 요즘의 요일에 해당한다.
달력에 서기와 나란히 표기됐던 ‘단기’는 고려 말 우왕 때 처음 사용됐으나 잘 쓰이지 않다가 조선 말 단군왕검을 기리는 대종교가 부활시켜 사용했다. 광복 후 정부의 공식 연호로 지정돼 공문서에 쓰이다가 5·16 쿠데타 이후 1962년 다시 서기로 바뀌었다.

단기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니 올해는 단기 434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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