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3) 전화

유인경 선임기자


“보고 싶어요, 엄마. 하늘나라에서도 제 목소리 들리세요?”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처음으로 집 전화가 개통돼 온동네가 떠들썩하던 날, 어머니(김혜자)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홀로 전화기를 붙들고 돌아가신 친정엄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했다.
새 학년이 되면 담임선생님이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텔레비전 있는 사람…손들어봐요”란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마다 번쩍 손드는 학생들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이장희는 히트곡 ‘그건 너’에서 헤어진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라고 노래했다.

신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불과 30여년 전의 풍경이다.

대한민국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6년. 이듬해 고종은 자신의 침소와 정부 각 부처를 잇는 전화를 설치했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을 음역한 ‘덕률풍(德律風)’ 혹은 말 전하는 기계란 의미의 ‘전어기(傳語機)’라 불렸다. 관료들은 전화가 울리면 큰절을 네 번 하고 무릎 꿇고 받아야 했다.
고종이 승하한 뒤엔 순종이 고종의 능에 전화를 설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통해 곡을 올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1955년의 전화 가입자는 3만9000명. 인구 1000명당 2대 꼴로 고관이 아니면 집에 전화기를 설치할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정부가 전화 매매를 제한할 당시 전화 한 대 가격은 260만원. 당시 서울시내 50평 규모 집값이 230만원 안팎이었다니 장난감처럼 초등학생도 갖고 있고 ‘공짜폰’이 가득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이다.

과거의 전화는 개인이나 한 가정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마을에 유일하게 전화기가 놓인 이장댁에서 “용식엄니, 서울 큰아들 전화왔슈. 빨리 와유”란 소식을 전하면 한달 만에 아들과 통화하던 엄마는 “전화비 무섭다. 편지하마”라고 아쉬워하며 끊었다.
단골다방의 전화번호를 연락처로 삼아 원고청탁이나 배역을 따내던 문인, 연기자들에겐 다방 전화가 생명줄이었다.


1970년대 대중의 소통수단이던 공중전화. 공중전화 부스에
사람들이 줄지어선 모습은 보기 흔한 풍경이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0년, 전화의 정체성은 뭘까.

이젠 잠시라도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과 초조감이 엄습해 금단현상을 느낀다. 전화가 안 오거나 보낸 문자에 응답이 없으면 배신감까지 든다. 오지에 가도 한동안은 벨소리나 진동음의 환청에 시달린다.
사랑을 전하던 전화로 연인과 작별하고, 직장의 해고 통지조차 문자메시지로 받는 세상이다. 한편에선 기러기아빠가 지구 반대편의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고 무뚝뚝한 시아버지도 “아버님 싸랑해용”이란 며느리의 애교문자에 미소짓는다. 9·11 테러의 순간, 희생자들은 휴대전화로 “사랑해”란 마지막 말을 가족에게 남겼다.

요즘 청취자들이 문자로 사연을 보내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선 “6535님은…”이라며 청취자를 휴대전화 번호로 분류한다. 현대인들에게 ‘바코드’가 하나씩 달린 셈이다. 그 바코드를 통해 우린 타인의 생각·행동·감정을 이해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런 전화의 위력을 ‘신흥종교’로 규정한다. 애초 전화의 목적은 ‘소통’이지만, 한국에선 권력·오락의 기능을 거쳐 ‘신흥종교’로 탄생했다고 말한다.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사용자의 중독 현상을 낳으면서 주객이 전도된 숭배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동력인 ‘셀룰러 이코노미’에 홀로 저항해 독야청청 산다는 게 가능할까.

인구 100명 중 95명이 휴대전화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신흥종교 신도가 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는 이들은 경이를 넘어 연구대상 수준이다. 외국 멋쟁이들이 한국산 휴대전화를 명품처럼 든 모습은 자랑스럽지만, 이 새로운 신흥종교에 우리의 영혼마저 잠식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그나저나 차세대 스마트폰은 어떤 제품을 선택해야 편리하면서도 ‘럭셔리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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