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 토정비결- 힘겨운 서민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다. 국치 이후 이 땅에선 식민, 분단, 군부독재, 산업화, 민주화의 고비고비가 이어졌다.
그 사이 우리네 생활상도 몰라보게 바뀌었다. 지난 100년간 필부필부들의 삶과 추억을 만든 풍속과 유행, 애용품을 통해 일상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옛것을 보냈으니, 새것을 맞아들일 일이다. 그러나 새것을 맞는 것은 설레는 만큼 걱정스럽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정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곤 했다. 올 한 해 우환은 없을까, 손재수는 없을까, 한 해의 신수(身數·몸의 운수)를 점쳤다. 점집에 가면 평생의 사주팔자까지 다 봐주지만 복채도 싸고 점괘도 알기 쉬운 토정비결이 신수풀이엔 그만이다.

토정비결은 신수를 점치는 책이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기인으로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1517~78)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토정은 유학은 물론 역학·수학·천문·지리에도 능했다.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토정을 찾아와 굶지는 않겠는지, 병치레는 안 하겠는지, 한 해 신수를 물었다. 관직에 있을 때 민생 돌보기에 힘썼던 토정인지라 ‘이를 어엿비 여겨’ 무지렁이 백성도 쉽게 신수를 볼 수 있는 비결을 지었는데 그게 토정비결이다.
토정의 저작이 아니라 민간에 나돌던 복서(卜書)에 토정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설도 있다.




1982년 토정비결 좌판을 벌여놓은 할아버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생년·월·일·시, 즉 사주(四柱)를 따져 치는 주역점과 달리 토정비결은 생년·월·일 삼주(三柱)로 신수를 본다.
따라서 주역의 64괘에 비해 토정비결은 16괘가 적은 48괘다. 토정비결의 괘는 생년과 생월, 생일(물론 음력)에 각각 숫자 하나가 주어져 3자리 숫자로 만들어진다. 한 해 신수와 다달이 초·중·하순으로 나눠 넉자 한시로 괘를 풀이했다.
넉자 한시에 담긴 뜻을 한글로 쉽게 풀어놓은 게 시중에 나도는 토정비결이다. 책마다 괘 풀이가 조금씩 다른 건 이 때문이다. 토정비결은 생년·월·일만 알면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위해 씌여진 것이 토정비결이다.

토정비결은 산업화로 인해 농촌사회가 붕괴되어 ‘무작정 상경’이 사회문제가 됐던 1960~70년대 인기를 끌었다. 글자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은 길거리 좌판 토정비결을 보러갔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잔돈푼에 신수를 봐줬다.
누르죽죽한 표지에 한지로 속지를 한 토정비결은 흡사 경전이나 고서처럼 보여 저절로 권위가 생겼다. 하도 들추다 보니 너덜너덜해진 책을 펴면 괘마다 붓그림이 엉성하게 그려져 있고 신수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신수풀이가 끝나면 누런 종이에 인쇄된 토정비결 신수풀이를 한 장 찢어서 줬다. 사람들은 그걸 잘 보관해 뒀다가 1년 내내 일이 잘 안풀린다 싶으면 찾아보고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60년대 작은 출판사와 인쇄소가 늘어나며 인쇄본 토정비결이 흔해졌다. 월간 여성지들도 다투어 가계부와 함께 토정비결을 신년호 부록으로 내놨다. 세밑이 되면 여성지 부록이든, 인쇄본이든 토정비결을 사서 가족의 새해 신수를 봐주는 일이 세시풍속처럼 됐다.

토정비결의 묘미는 뭐니뭐니 해도 알듯 모를 듯한 신수풀이다.

‘운수가 대길하니 도처에 춘풍이라’ ‘용이 구슬을 얻으니 조화가 무궁하다’ ‘삼월 동풍에 제비가 집을 짓는다’ ‘동쪽과 남쪽에서 귀인이 돕는다’.

상징과 비유로 이뤄진 신수풀이는 한 줄 시와 같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어쨌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기는 하다. 나쁜 운세도 비슷하다. ‘가야 할 길이 구만리인데 서산에 해가 지는구나’ 같은 비유적 표현이 주를 이룬다.
더욱 좋은 것은 운세가 나쁘면 바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처방을 내려준다는 점이다. ‘여색을 가까이 마라, 구설이 있다’ 라든가 ‘망령되이 행동마라, 재물을 잃는다’ 같이 대개 근신하라는 처방이다.

‘도처에 재물이 있다’는 말에 희망을 품고, ‘허욕을 부리면 재물을 잃는다’는 말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새해 첫날이 된다면 지하의 토정도 빙그레 웃음지을 것이다.


윤성노기자 ysn0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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