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5) 싱크대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코흘리개들은 할 일 없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맴돌 듯 부엌 문턱을 수시로 오고갔다.
군것질은 물론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 부엌이라고 특별히 맛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부뚜막에 올라앉았다가 빗자루로 맞거나, 한밤중 몰래 들어가 제사 전날 기름진 음식을 훔쳐먹다 혼쭐이 난 기억….

부엌은 아이들에게 추억의 장소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에게 부엌은 징글맞은 곳이었다.

고된 시집살이가 대물림되는 혹독한 현장이었을 뿐 아니라 빈 쌀독과 마주하며 가난을 견뎌내야 하는 모진 곳이기도 했다. 더욱 서러운 것은 구부정한 허리와 관절로 힘겹게 부엌 문턱을 오르내릴 쯤이면 여자로서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옛 부엌 바닥은 마당보다도 움푹 팼다. 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의 높이가 낮았기 때문이다.
대가족을 위한 무거운 밥상이나 설거지통을 들고 넘나들기는 고역이었다. 부엌에서 찬거리를 마련하는 일이나 설거지 등 모든 일은 잔뜩 쭈그린 자세라야 가능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부엌에선 정리되지 않은 반찬 그릇과 냄비, 솥, 찬장, 온갖 잡동사니가 공생했다. 생활이 좀 나은 집은 일본산 곤로를 일찍 들여놨다. 나무로 불을 지핀 시골 부엌의 천장과 벽에는 검은 그을음이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1970년대 여성들의 ‘로망’이었던 싱크대가 놓인 부엌 풍경.| 에넥스 제공



그런데 40여년 전 부엌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했을 때의 감격에 비교한다면 지나칠까.

입식 부엌이 보급되면서 싱크대가 등장했다. 여자들은 두 다리를 쭉 펴고 일하게 됐다. 싱크대가 보급되기 전에는 타일로 외장한 시멘트 개수대가 가장 세련된 것이었다. 개수대가 ‘씽크’로 불린 스테인리스로 바뀌면서 싱크대는 부엌가구의 대명사가 됐다.

국내 처음의 싱크대는 71년 나온 오리표(현재 에넥스) 싱크다.
부부애를 상징하는 오리 그림은 주부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물 위에서 노니는 오리처럼 부엌에서 편히 물일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오리표 싱크대는 주부들의 ‘로망’이었다.

싱크대를 들여놓는 날이면 여자들은 새 집을 장만하듯 기뻐했고 친구들을 불러 자랑하기 바빴다. 오리표가 큰 인기를 끌자 ‘백곰표’ ‘원앙표’ ‘백조표’ ‘거북표’ 등 후발업체가 생겨났다.
당시 삼륜 용달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골목마다 싱크대 제조업자가 생겨나 350개가 난립했다. 덕분에 74년 무렵의 취업희망자들에게 항공사, 은행에 이어 오리표 싱크대 회사는 선망의 직장이 됐다. 80년대 초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싱크대는 품귀현상까지 빚었다.

싱크대의 원조는 어디일까.

부엌 살림살이를 넣어두는 수납장과 붙박이 싱크대가 기본인 현대 부엌의 효시는 1926년 독일에서 선보인 ‘프랑크푸르트 부엌’이다. 일체형 부엌으로 건축가 그레테 쉬터-리호츠키가 만들었다.
프랑크푸르트 부엌은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운동 ‘바우하우스’의 산물이다. 전후 독일의 예술가들이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단순한 디자인’을 내세운 덕분에 여성들은 부엌 노동에서 삶의 여유를 찾게 됐다.
부엌이 방, 마루와 동등하게 집안에 위치하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능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의 부엌 풍경은 어떨까.

온 가족의 가장 친근한 공간인 동시에 최첨단 과학기술 전시장이 되어가고 있다. 외출시 원격조정으로 전기밥솥의 시작 버튼을 누르고, 마트에서 실시간으로 냉장고 안의 식품 목록을 파악해 찬거리를 구입한다. 지능형 싱크대는 주인의 체구를 센서로 감지해 스스로 높낮이를 조정한다.

옛날 어머니들은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극진히 모셨다. 매일 새벽 일어나 중발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건강을 조왕신에게 빌었다. 현대 부엌에서 쫓겨난 우리의 조왕신들은 지금 어디에 가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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