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4) 도시락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수업시간보다 점심시간에 먹던 ‘도시락’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땐 왜 그리 자주 배가 고팠을까.
점심시간에 먹어야 할 도시락을 2교시만 끝나면 허기져서 꺼내들곤 했다. 다이어트 열풍에 새처럼 조금 먹는 요즘 소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양은 도시락통에 꾹꾹 눌러 담은 밥과 멸치볶음, 노란 무짠지, 콩자반 등 소박한 반찬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어머니는 거버 이유식병이나 맥스웰 커피병에 김치를 담아주셨다. 때론 가방 속에서 허술하게 잠긴 김치 병뚜껑이 열려 버스 안에서 냄새가 진동할 땐 하얀 옷깃의 청초한 여학생 얼굴이 김치국물처럼 벌게졌다.

도시락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락밥과 표주박 물을 뜻하는 ‘단사표음’이란 말이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걸로 보아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다시 일본까지 전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모든 것을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일본의 도시락 ‘벤또’가 다시 전해져 예전엔 도시락을 ‘변또’라고 부르기도 했다.

겨울엔 특히 도시락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4교시엔 교실 중앙에 있던 조개탄이 활활 타는 난로 위에 도시락을 탑처럼 층층이 올려놓았다.
당번은 도시락이 안 타도록 수시로 바꿔놓느라 바빴고 난롯불에 반찬과 밥이 적절히 데워진 도시락을 마구 흔들어 비빔밥처럼 먹거나 살짝 타서 노릇노릇 누룽지가 된 밥을 친구들과 함께 먹는 즐거움은 또 얼마나 컸는지.
추억은 아름답게 포장되게 마련이지만 그땐 친구들 사이에 왕따도 없었고,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들에게 “난 속이 안 좋구나. 네가 대신 먹어라”라며 자신의 도시락을 건네던 인자한 선생님들도 많았다. 아니 그렇게 기억된다.



겨울철에 난로에 올려 데워 먹던 양은 도시락. 반찬이 섞여 비빔밥이 되고 노릇한 누룽지까지 선물했다. | 정지윤 기자



그땐 행복이 얼마나 쉽게 찾아왔던가. 어쩌다 어머니가 달걀옷을 입은 분홍소시지나 쇠고기 장조림, 혹은 깨소금이 뿌려진 유부초밥이라도 싸주신 날은 매우 행복해 절로 콧방울이 발름거려졌다.
제삿날 다음엔 각종 전과 나물반찬을 싸와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 친구들이 각자 다른 반찬을 싸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도시락은 또 다른 사회교과서이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남녀차별’과 ‘빈부격차’, 그리고 ‘계급의식’까지 일깨워주었다.
책은 빠뜨리고 가도 도시락은 절대 잊지 않고 챙겨갔지만 어쩌다 오빠 도시락을 잘못 들고 온 날, 내 초라한 반찬과 달리 들어 있던 계란프라이 때문에 느꼈던 어머니의 아들 선호사상으로 인한 배신감은 한참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나의 촌스럽다 못해 무식해보이는 양은도시락통과 달리 반찬칸까지 따로 있는 산뜻한 플라스틱 도시락,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국물을 자랑하는 보온도시락, 심지어 점심시간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막 지은 따끈한 밥과 숭늉까지 들고 왔던 부잣집 친구들을 보며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1970년대 혼식장려 운동이 한창일 때는 전세가 역전됐다. 정부에선 도시락에 쌀과 보리를 7 대 3 비율로 싸오라고 지시하고 쌀밥만 싸온 학생들은 선생님께 이름을 적히거나 야단을 맞았다. 넉넉한 보리밥과 부자 친구의 장조림 반찬이 교환됐다.

빈 양은도시락 속에서 젓가락이 덜그렁거리던 소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꼬마들은 이제 중년이 됐다. 가난한 살림에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학교 수돗가에서 물을 마셔 배를 채우던 학생들 가운데 출세한 이들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 급식이 실시되어 어머니들의 도시락과 반찬 스트레스도 해소됐다. 이젠 자원봉사 주부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홀로 사는 독거노인들을 위해 도시락을 싼다.

하지만 평등한 단체급식시대가 행복하지 않은 건 왜일까.

아이들 건강보다 돈을 생각하는 업자들은 불량재료로 아이들을 아프게 하고, OECD 가입국이란 말이 부끄러울 만큼 해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 굶는 결식학생들이 급증한다.
또 강남에선 수백억원짜리 동사무소가 지어지지만 올해 보건복지가족부의 결식아동 급식예산은 543억원 깎였단다. 명절엔 한 개에 100만원이 넘는 초호화 도시락이 선물로 판매된다. 초라했지만 따뜻한 정이 가득했던 옛날 도시락이 그립다.

'경향신문 역사시리즈 > 100년을 엿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 입학  (0) 2010.02.26
(15) 양장점  (1) 2010.02.21
(13) 목욕탕  (0) 2010.02.11
(12) 담배  (0) 2010.02.07
(11) 볼펜과 필기구  (0) 2010.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