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5) 양장점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요즘은 여고 졸업선물로 쌍꺼풀 수술을 해준다지만, 1970년대까지는 엄마들이 졸업하는 딸의 손을 잡고 양장점을 찾곤 했다.

칙칙한 교복 대신 산뜻한 투피스나 원피스를 입혀, 소녀에서 숙녀로 만들어주고 싶어서다. 온갖 원단과 패션잡지가 가득한 양장점에서 주인은 마법의 양탄자를 펼치듯 옷감을 펼쳐보이고 디자인을 설명했다.

1975년 양장점이 밀집된 서울의 거리. 경향신문 자료사진



“처음엔 이런 감색 정장이 단정해보이지. 같은 감으로 후레아(플레어) 스커트를 하나 더 맞춰 블라우스를 잘 받쳐 입으면 여러 벌의 효과를 낸다니까. 이탈리아 원단이 좋긴 하지만 비싸니까 국산도 괜찮아요. 얼굴이 예뻐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네….”

칭찬에 우쭐해진 모녀는 디자인을 결정하고 ‘가봉’ 날짜를 약속하고 봄햇살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간다. 변변한 기성복이 없던 시절, 패션의 첫걸음은 양장점을 통한 ‘맞춤옷’이었다.
졸업식이나 약혼식 등 행사 때면 멋쟁이들은 공식처럼 이대 앞이나 명동 등의 양장점을 찾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예단으로 고급 옷감을 보내는 풍습이 있어 옷감을 들고 양장점을 찾는 일도 흔했다.

<한국 최초 101장면>의 저자인 소설가 김은신씨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첫 양장 여성은 윤치호의 부인 윤고라(본명 김고라)였다고 한다. 1899년 촬영된 사진에서 그는 가슴에 레이스가 장식된 롱 드레스에 깃털과 리본이 달린 넓은 모자 등 당시 유럽 패션의 첨단을 걷는 차림새를 하고 있다.

나혜석 등 1920~30년대 ‘모던걸’들도 세련된 양장을 입었지만 한국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양장을 입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다. 일본에서 양재기술을 공부한 최경자·서수연씨, 최초의 미국유학파 디자이너 노라노씨 등이 폐허가 된 명동에 양장점을 차려 60년대 중반 이후까지 양장점 시대를 꽃피웠다.
송옥·아리사·노라의 집·엘리제 등의 상호를 내건 명동 양장점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모여들었다. ‘예쁘다 양장점’ 등 어린이 전용 맞춤복집도 있어 공주풍의 옷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팔순이 넘은 요즘도 강남 학동 사거리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는 노라노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50년대의 패션리더들은 상류층 부인이 아니라 미군부대의 연예인들이었어요. 미군부대 무대에 서던 가수들의 드레스를 만들어주면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죠. 당시 디자이너들은 옷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익숙지 않은 서양옷을 멋지게 입는 법을 지도해주는 등 코디네이터 역할도 했어요. 유명 배우들도 영화에 출연할 땐 무조건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죠. 60년대가 되어서야 일반 부인들이 양장점을 찾았고 사랑방처럼 모여 대화도 나누는 사교의 장소가 됐어요.”

최경자씨가 ‘국제복장학원’을 만들어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후 70년대까지 서울 명동은 양장점의 메카였다. 명동 골목엔 크고 작은 양장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당시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문영자씨는 지금의 ‘부르다문’, 이철우씨는 ‘마담포라’ 등의 기성복 브랜드를 만들어 성공했고 앙드레 김씨는 지금까지 맞춤식 부티크를 운영 중이다.

지금 한국 패션을 대표하는 진태옥·설윤형·한혜자씨도 출발점은 명동 한 모퉁이의 양장점이었다.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대 근처에도 양장점들이 속속 들어섰다.

명동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양장점은 80년대 기성복 붐과 함께 급격히 쇠락했다. 이후 일부 디자이너들이 강남의 청담동·압구정동으로 옮겨 샤넬, 프라다 등 해외 명품숍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장점은 ‘사모님’들의 사교장 역할만은 놓지 않았다. 99년 고관 부인들이 ‘라스포사’에 모여 옷 선물을 하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옷로비 스캔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 남성들은 고가의 옷값에 놀랐지만 ‘패션을 좀 아는’ 여성들은 “귀부인들도 알고 보니 촌스러운 아줌마들”이라고 살짝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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