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7) 시계

김후남 기자 hoo@kyunghyang.com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생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회중시계가 오는 10일 경매에 나온다는 보도가 있었다. 스위스의 고급 시계 브랜드인 바셰론 콘스탄틴에서 제작한 것으로, 뒷면에 대한제국 문장인 ‘이화문(李花紋)’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시계 한 개 값은 서울의 작은 기와집 한 채 값에 맞먹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회중시계 | 연합뉴스


순종은 시계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계가 있었다. 순종은 이 시계들이 시간을 알리기 위해 각기 다른 소리로 한꺼번에 울릴 때 매우 즐거워한 반면, 하나라도 종이 앞서거나 늦게 울리는 날이면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는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에게 전화로 문안을 드릴 때면 꼬박꼬박 “아바마마 시계는 지금 몇 시이옵니까?”라고 물으며 고종의 시계와 창덕궁의 시계를 맞추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역법을 축으로 하는 기계식 시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31년이다. 하지만 시간을 분할해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자명종이라는 이름의 기계식 시계는 일정한 시각에 소리를 내는 기이한 물건으로만 생각됐다. 오랫동안 관심 밖에 있던 서양의 기계식 시계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이다. 외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는 가운데 시계가 으뜸의 귀한 물건으로 여겨진 것이다. 손목시계가 나오기 이전이었으므로 당시 시계는 모두 회중시계였다. 양복 조끼에 시곗줄을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회중시계를 꺼내 ‘폼 나게’ 들여다보는 신사의 모습을 누구나 부러워했다. 시계 한 개를 뇌물로 받고 일본에 이권을 넘겨준 외무대신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당시 시계는 귀물(貴物)이었음에 틀림없다.

시계는 왕실이나 고관대작 사이에선 널리 퍼져갔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여전히 낯선 물건이었다. ‘보리가 팰 때’ ‘보름달이 뜰 때쯤’ 식으로 약속을 해오던 농경시대 사람들에게 하루를 이등분하고 또 그것을 열두 개로 쪼개는 등 복잡하기 그지없는 서양식 시간 개념과 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한국 사람을 비꼬는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서양식 시간 개념 때문에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전차나 증기선이 시간을 정해 놓고 운행하고, 도심 곳곳에 ‘공공시계’가 등장하면서 시계는 자연스럽게 보통 사람들의 생활에 젖어들었다.

1950년대 들어 우리나라 기술로 시계가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시계는 쉽게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제조 기술도 정밀하지 못해 당시 시계는 걸핏하면 고장 나거나 늦어지기 일쑤였다. 시계를 차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정확한지 자신할 수 없었다. 라디오에서 정시에 알려주는 시보에 따라 시간을 맞추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금·은과 함께 ‘보물’ 대접을 받으며 주로 금은방에서 판매되었다. 이런 귀한 대접은 70~8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당시 손목시계는 졸업과 입학철 최고의 선물이었고, 집들이나 개업식 선물로도 인기 만점이었다.

손목시계는 ‘현금’ 대용이기도 했다. 대학가 주점이나 전당포에는 술값이나 급전 대신 맡겨놓은 시계가 수북이 쌓였다.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던 사람이 가게 문을 닫으면서, 서울대가 동숭동에 있던 시절 학생들이 술값 대신 맡긴 시계를 서울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시간이 물화된 상태가 시계다. 시간의 물화가 진행되는 만큼 시계는 흔해지고 시계의 가치는 서서히 추락했다. 지금도 일부 부유층이나 멋쟁이들은 명품시계를 애호하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시계를 옷 색깔에 맞춰 바꿔 차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한다. 아예 시계를 차지 않고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서랍 속에 팽개쳐둔 손목시계를 오랜만에 꺼내보지만 처음 시계를 찼을 때의 가슴 두근거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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