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9) 버스 차장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서울시는 지난해 3월17일부터 10일간 ‘해피 버스 데이(Happy Bus Day)’란 캠페인을 벌였다. 경기침체로 고통을 겪는 시민들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 151번 버스에 안내양을 배치해 친절 서비스를 보이는 이벤트였다.
젊은이들은 신기한 눈빛을 보냈지만 과거의 버스 안내양, 아니 ‘뻐스 차장’을 기억하는 중장년층들은 가슴 한쪽이 뜨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1970~80년대 우리가 만난 버스 차장은 ‘해피’한 직장여성이 아니라 하루하루 고단한 삶과 싸우는 슬픈 눈빛의 생활전사였기 때문이다.


충남 태안군의 버스에서 차장이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태안군은 관광 홍보와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를 위해 2006년 차장(안내양) 제도를 부활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깻잎머리에 베레모를 실핀으로 고정하고 제복을 입은 버스 안내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61년. 버스가 본격적으로 서민의 발 역할을 하기 시작한 49년 이후 ‘조수’란 명칭으로 남자들이 차장 역할을 하다 손님과 자주 다투고 인건비도 비싸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들로 교체됐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버스 안내양의 평균 연령은 18세였다. 61년 1만2560명이던 안내양은 71년 3만3504명, 70년대 중반엔 5만여명까지 이르렀지만 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줄었고, 89년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되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73년에 발표된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은 버스 안내양 출신이다. 식모·봉제공 등을 전전한 끝에 버스 안내양이 된 영자. 하지만 만원버스에서의 교통사고로 한 쪽 팔을 잃고 자살을 기도하고 그마저 실패로 끝나 성매매의 늪으로 전락하는 소설은 당시 시골에서 가난을 면하려 상경했던 소녀노동자들의 잔혹한 삶을 그려 충격을 던졌다.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오라이~”라고 씩씩하게 외치던 안내양은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단체 숙소에서 겨우 4~5시간 눈을 붙인 뒤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안내양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부족한 잠이나 승객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넣는 데 소모되는 체력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또래 여학생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이나 술주정하는 남자 승객의 지분거림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안내양이 직접 버스비를 받았기에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승차감시원의 승객계수와 안내양의 입금액이 차이가 나면 차액을 월급에서 까고, 돈을 숨겼다며 알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엔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한 안내양의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 민병욱씨는 한 칼럼에서 70년대 기자 시절의 일화를 들려준다.

“중랑교 넘어 어느 종점의 버스회사 안내양들이 인격모독적인 알몸수색을 더이상 못 참겠다고 고발해서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소녀 티를 못벗은 차장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수치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문제는 그 안타깝고 슬픈 현장에서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는 거다. ‘청량리 지나 중랑교 가요~’라고 외치는 안내양의 말을 당시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고 말하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는데 하필 청량리 방향을 운행하는 버스 안내양이 말해버리니 나도 모르게 쿡 웃음이 새 나왔다.”

버스 안내양을 천사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중소기업 사장인 정도영씨(55)는 71년에 신촌을 운행하던 버스안내양 누나를 꼭 찾고 싶다고 한다.

“버스 표를 못내 쭈뼛거리니까 안내양 누나가 날 물끄러미 보더니 그냥 내려주더군요. 그후로 몇번이나 공짜로 태워줬는데 어느날 ‘내 동생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이담에 꼭 성공해요’라고 말한 다음날부터 안 보입디다. 다시 만나면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요.”

매일 차창에 매달리는 곡예를 하고, 돈을 숨긴다는 의심까지 받으면서 너무 일찍 삶의 고단함을 체험한 버스 안내양들. 그 많은 안내양들이 지금은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순결한 영혼을 존중받아야 할 그들에게 ‘알몸수색’을 했던 어른들은 또 어떤 노후를 보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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