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8) 미니카세트 ‘워크맨’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지난해 영국 BBC 매거진에 mp3플레이어 ‘아이팟’ 대신 일주일간 미니카세트 ‘워크맨’을 써본 13살 소년의 체험기가 실렸다. 소년은 테이프의 반대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사흘이 걸렸으며 카세트테이프의 재질에 따른 종류를 뜻하는 메탈/노멀 스위치를 이퀄라이저로 오해했다고 고백했다. 원하는 곡을 듣기 위해 되감기와 빨리감기 버튼을 마구 눌러대다 아버지로부터 “(그러다) 워크맨이 테이프를 먹는다”는 소리를 듣고 며칠간 음악 없이 지냈다고 썼다.


소니의 초기 워크맨.


버튼 하나만 누르면 손쉽게 작동되는 요즘 mp3플레이어를 사용하는 10대들에게 미니카세트는 낯설고 불편한 기기다.

그렇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청소년들에게 미니카세트는 꿈의 기기였다. 일본 소니사가 세계 최초로 초소형스테레오카세트 ‘워크맨’을 출시한 것은 1979년이다. 담뱃갑만한 크기에 무게는 390g. 실내에서만 들을 수 있던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그것도 오디오시스템에 버금갈 정도의 음질로 들을 수 있게 해준 기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워크맨은 전 세계적으로 1년 새 100만대가, 5년간 1000만대가 팔렸다.

당시 일제 가전제품은 수입금지 품목이었지만 세계적 워크맨 열풍은 금세 국내에도 상륙했다. 교포와 보따리무역상을 통해 음성적으로 거래되던 미니카세트는 80년대 초 영어회화 붐이 일면서 학생뿐 아니라 직장인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일간신문에서 미니카세트 중고품 시세를 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미니카세트의 중고가는 8만원에서 12만원.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가여서, 일본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미니카세트를 사들고 왔다.

미니카세트는 보온밥통과 더불어 김포세관에서 수시로 적발되는 과다반입제한품목 중 하나였다.

기성세대의 눈에 허리춤에 미니카세트를 차고 스테레오헤드폰을 낀 젊은이들의 모습은 우주인과 다름없었지만(경향신문 1981년 6월1일 기사),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개인용 엔터테인먼트 기기에 대한 수요를 확인한 국내 제조사들은 서둘러 미니카세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25개사가 난립하다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삼성의 ‘마이마이’, LG전자의 ‘아하프리’, 대우전자의 ‘요요’로 삼파전이 굳어졌다.

국산은 모양이 다소 투박했지만 가격이 일제에 비해 저렴한 편이어서 막 음악에 눈뜬 청소년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미니카세트는 졸업과 입학 시즌 최고의 선물품목이었다. 어른들은 헤드폰 끼고 책상에 앉아있는 중·고생 자녀들에게 “음악을 들으며 무슨 공부가 되느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이들에게 음악은 공기와 같았다.
92년 초 미국 팝그룹 뉴키즈온더블록 내한공연 당시 참사에서 보듯, 이들을 통해 팬덤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의 까다로운 귀는 이후 국내 가요의 질적 성장을 꾀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90년대 초반 CD의 시대가 본격 도래했지만 타격을 받은 것은 미니카세트가 아니라 턴테이블이었다. 음질은 뛰어났지만 휴대용 CD플레이어는 미니카세트에 비해 고가인 데다 부피가 크며 결정적으로 CD음반 가격이 테이프보다 비쌌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학생들은 미니카세트를 더 선호했다.
복병은 mp3플레이어였다. 98년 세계 최초로 국내업체가 mp3플레이어의 원천기술을 개발했다. 테이프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작고 가벼운 데다 많은 곡을 저장할 수 있고 장시간 청취가 가능한 mp3플레이어는 휴대용 음악재생기기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미니카세트의 시대는 지고 있었다. 2000년대 초 한국이 mp3플레이어의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자사의 미니카세트를 단종시켰다.

그러나 국내 제조사가 갖고 있던 mp3의 원천기술 특허는 미국으로 넘어갔고 미국 애플사가 내놓은 아이팟은 mp3플레이어와 동의어로 통하며 전 세계 휴대용 음악재생기기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워크맨에서 출발한 휴대용 음악기기들은 이제 음악의 유통구조마저 바꿔놓을 정도로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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