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16) 입학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다음주면 각급 학교에서 입학식이 치러진다. 옛날 초등학교 입학식 땐 코흘리개들이 거즈 손수건(신입생이라는 표지이자 코를 닦는 용도이기도 하다)을 가슴에 달고 ‘앞으로 나란히’를 했다.

부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보지만 꾸중 가득한 엄마 아빠를 쳐다보고는 이내 주눅 들어 동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처음 보는 동무, 어색하던 것도 잠시. 아예 뒤돌아 장난질하느라 선생님 구령은 뒷전. 부스대는 아이들 열기에 언 땅도 제풀에 녹아 운동장은 온통 진창이다.

봄냄새 맡은 병아리처럼 아이들은 ‘하나, 둘’ ‘셋, 넷’ 선창에 후렴을 붙이며 교실로 들어갔다. 코 흘리며 동네를 쏘다니던 아이들은 봄마다 그렇게 학생이 됐다. 1960년대 말이니까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 때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줄을 맞춰 선 1학년 어린이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민학교는 일제 말기인 1941년 일왕의 칙령으로 생겼다. ‘국민’은 황국 신민을 뜻한다. 그러니까 국민학교는 황국신민을 육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조선인들을 아이 때부터 황국신민으로 세뇌시켜야 했다. 교육이 ‘민족의 백년대계’가 아닌 ‘일본의 제국대계’가 된 것이다.

국민학교 전에는 소학교와 보통학교였다. 조선조 말인 1894년 친일파 내각은 국민 교육의 일환으로 소학교를 설립했다. 그해 9월 관립 교동왕실학교가 개교해 최초의 공식 근대 초등학교로 이름을 올렸다.

이보다 두 해 전 미국인 선교사가 인천에 영화학당(현 인천 영화초교)을 열었지만 1912년에서야 인가를 받았다.

일제는 1906년 보통학교령을 공포하고 1909년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꾸며 조선합병 전 교육을 통제했다. 보통학교는 일제 말인 38년 다시 소학교가 됐다가 41년 국민학교로 개칭된다. 김영삼 정권은 일제 잔재 뿌리뽑기(95년 일제 총독부 청사로 쓰였던 중앙청을 철거했다) 시책의 일환으로 96년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초등학교 이름이 여러번 바뀌면서 3대나 4대가 모이면 세대마다 다닌 학교가 다르다. 할아버지는 보통학교나 소학교를 다녔고 아버지는 국민학교, 아들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노년 세대들은 여전히 초등학교를 ‘소학교’나 ‘보통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민학생이 중학생이 되려면 여러가지가 달라져야 했다. 먼저 남자 아이들은 머리를 빡빡 밀었다. 이발소에 가서 “중학교 가는데요”라고 하면 두말없이 머리기계(바리캉)질을 해줬다.
그래도 부모님 손잡고 교복을 맞추러 갈 땐 제법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교복은 3년 입을 걸 예상해 두세치 이상 크게 맞췄다. 헐렁헐렁한 검은색 교복을 목단추까지 꼭꼭 채우고 나면 아버지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치수 큰 모자는 머리 위서 빙빙 돌았다.

여자아이들은 하얀 칼라를 덧댄 교복(세일러복을 입기도 했지만)을 입고 단발머리를 했다. 귀가 보이게 잘라야 했으니 드러난 뒤통수 아래와 목덜미는 면도를 했다.

일제 때는 중학교가 따로 없었다. 고등소학교나 보통학교 고등과를 다녔고 그곳을 졸업한 뒤 고등보통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줄여서 고보라 불렀다)로 진학했다.

중학교는 38년 분리됐으며 6·3·3·4학제가 도입된 49년 이후 본격적으로 생겼다. 초등학교 시절 멋모르고 손잡고 뛰어다니던 남자, 여자아이는 중학생이 되며 남자중학교와 여자중학교로 나뉘어 생이별(?)을 했다.
물론 간간이 남녀공학인 중학교도 있었지만. 그러나 못 먹고 자란 탓에 한 반(60~70년대엔 70명 정도가 한 반이었다)에 두어 명을 빼곤 수염 난 남학생도, 교복 가슴께가 볼록한 여학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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