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20) 강남 아파트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강남은 그때는 시골이죠. 솔직히, 벌판이었어요. 누이동생이 와가지고 막 울더라고요. 오빠가 어떻게 돼서 이런 데 사느냐고. 시골 갔다 오면 버스에서 내려 소변 보던 데예요. 화장실이 없으니까. 그때는 강남도 아주 형편없었죠.”

최근 출간된 <서울 토박이의 사대문 안 기억>이라는 책에서 홍순하씨(1932년 종로구 청진동 출생)는 이렇게 회고한다. 여든 가까운 어르신의 추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억이 있다. 서대문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조금 과장하면, 하룻밤을 자고 나면 급우 한두 명씩이 전학을 갔다. 주로, 부촌으로 손꼽히던 연희동의 마당 넓은 단독주택에 살던 친구들이었다. 이들의 행선지는 대부분 압구정동과 반포동, 서초동의 아파트였다.
울며 떠나간 친구들 가운데는, 드물지만 다시 돌아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파트 단지만 덩그렇게 들어섰을 뿐, 학교 등 기반시설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유턴한 친구들은 말하곤 했다. “비가 오면 학교 운동장이 진흙탕이 돼서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해….” ‘교육 특구’로 불리는 지금의 강남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빽빽이 들어찬 서울 강남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오늘날의 강남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당시 강남은 인구가 3만명도 채 안되는, 배밭이 듬성듬성 흩어진 농촌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인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주거환경이 악화되자 한강 이남으로 눈을 돌렸다. 강북에 도심 기능이 집중되면 국가안보 측면에서 위험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69년 강남과 강북 도심을 잇는 최초의 다리인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75년 강남구가 생기고 이듬해 압구정동, 도곡동, 반포동 등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 이사를 꺼린다는 분석이 나오자, 정부는 강북의 전통적 명문고들을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경기고와 서울고가 먼저 총대를 멨고 휘문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이 뒤를 따랐다. 8학군의 시작이었다.

강남 개발 초기, 강남 신드롬의 중심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있었다. 78년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이던 한국도시개발은 사원용으로 지은 아파트 900여가구 중 600여가구를 고위공직자 등에게 특혜 분양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지만, 엄청난 프리미엄 액수가 공개되면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로 만드는 구실도 했다.
신흥 부유층은 물론 전문직 종사자와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까지 줄줄이 압구정동으로 몰려갔다.

중산층도 뒤질세라 앞다퉈 강남으로 향했고, 투기 행렬 속에 ‘부동산 졸부’니 ‘복부인’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됐다. 돈이 옮겨가자 환락의 중심지도 이동했다. 80년대 나온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나 ‘신사동 그 사람’은 이런 세태 변화를 드러내는 가요다.

20년 넘게 계속되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영광은 2000년대 들어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넘어갔다. <월급쟁이 부부의 타워팰리스 입성기>라는 책이 나올 만큼 타워팰리스는 ‘부의 표상’으로 등극했다. 최근에는 삼성동 아이파크와 대치동 동부센트레빌이 타워팰리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초고가 아파트 대열에 올랐다.

강남은 이제 단순한 지역의 이름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누군가가 “저, 강남에 살아요”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재산은 물론 학력과 외모, 스타일, 문화적 취향까지 함께 떠올린다. 진입장벽이 높은, 완전히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다.

강남과 강북 사이의 간극은, 심리적으로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간극을 능가할지 모른다. 지난 1월 초 서울에 사상 최대 폭설이 내렸을 때 ‘제설에도 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난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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