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80년 11월 송전탑 시비 환경권 첫 인정

1980년 11월15일자 경향신문 7면에 다소 이례적인 기사가 실렸다. ‘인격권 소송 주민이 승리’ ‘새 헌법에 명시된 환경권 인정 첫 사례’라는 표제가 붙었다. 한국전력의 주택가 고압전선 공사에 맞선 주민들이 법정투쟁 끝에 승리했다는 내용이다.

한전은 1979년 9월 낙동강 하구 산업단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154㎸ 송전탑 공사를 착공했다. 마을과 680m 떨어진 부산 서구 하단동~당리동 구간이 문제였다. 1500여가구 6000여명 주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공사 현장에 천막을 치고 매일 10여명씩 밤을 새며 공사를 저지했다. ‘인격권 침해 예방 청구소송’도 냈다.


한전은 주민들의 주장이 워낙 완강하자 법원에 공판 연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애초 노선에서 6㎞ 떨어진 곳에 송전탑을 세우기로 하고 설계를 변경했다. 법의 심판을 받기 전에 주민과 타협한 것이다. 주민들이 재산권은 물론 쾌적한 공간에서 살 권리를 요구했고, 헌법에 새로 명시된 환경권을 당국이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승리였다. 1980년 개정한 헌법 제35조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환경권을 명시하고 있다.

송전탑은 고압전기를 실어나르는 전기의 고속도로다. 한전 자료에 따르면 국내 송전탑 숫자는 4만1555개에 달한다(2013년 9월 기준). 154㎸ 송전탑이 2만9062개, 345㎸ 송전탑이 1만1591개, 밀양 송전탑과 같은 765㎸가 902개다. 거대한 ‘괴물’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밤낮 없이 웅웅거리고 있다.

문제는 원전과 화력발전 중심의 에너지정책으로 더 많은 괴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송전탑이 늘수록 주민들의 인격권과 환경권 침해 가능성도 높아진다. 밀양 송전탑 갈등이 대표적 사례다. ‘평생 살아온 터전에서 평화롭게 살게 해달라’며 10년 가까이 외친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절규를 국가와 자본은 끝끝내 외면했다.

지난 11일은 ‘밀양 송전탑 농성장 행정대집행’이 강행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한전은 행정대집행 석 달 만에 일사천리로 송전탑을 완공했다. 하지만 ‘밀양’은 현재진행형이다. 225가구가 합의금 수령을 거부하며 밀양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는 ‘행정대집행 1주년 기억 문화제’를 계획했다. ‘국가폭력을 겪었지만 밀양 주민들은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지난 6일 열려던 행사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문에 다음달로 미뤄졌다. 밀양 할매와 할배들의 눈물과 분노를 담은 다큐영화 <밀양아리랑> 개봉 날짜도 늦춰졌다. 무능한 국가가 밀양을 끝까지 괴롭히는 형국이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전기 중독에 걸린 우리 삶이 바뀌지 않는 한 송전탑은 계속 늘어날 것이고, 또 다른 ‘밀양’도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