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78년 8월31일 시내버스 계수기 다시 등장

며칠 전 성인 버스요금이 1250원으로 인상됐다. 40년 전인 1975년에 35원이었으니 40배 가까이 올랐다. 버스요금도 많이 올랐지만 그사이 시내버스와 관련된 많은 것들도 잊혀지거나 사라졌다.

버스 회수권, 토큰, 버스요금 삥땅(가로채기), 버스 안내양…. 지금은 거의 볼 수 없거나 쓰이지 않아 화석처럼 되어가는 것들. 지금부터 40여년 전인 1970년대 중반 즈음의 추억거리들이다.

버스 회수권과 토큰은 만원버스에서 잔돈을 거슬러줘야 하는 불편함을 줄이고 삥땅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대부분 회수권은 가로 5㎝, 세로 20㎝ 정도의 크기에 10장의 버스표가 인쇄돼 있었고 한 장씩 잘라서 사용했다. 사용자에 따라 ‘중고생’ ‘대학생’ ‘일반’이라는 표기가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학 100원 생’의 형태로 사용자와 가격이 병기된 형태도 있었다. 회수권은 곧 돈이었기 때문에 대량으로 위조해 팔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토큰은 50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에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납이나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회수권과 마찬가지로 학생용과 일반용이 달랐다. 당시 시내버스의 꽃은 버스 안내양이다. 코미디언 이영자가 안내양 역할을 하면서 ‘내리실 분 안 계시면 오라이~’라는 코믹한 유행어를 남기며 희화화됐지만 실제 생활은 정신적·육체적 중노동이었다. 버스의 출발이나 정차 안내 말고도 수금과 승객 응대, 안전까지 운전 빼고는 대부분이 안내양의 몫이었다. 개문발차(開門發車)가 다반사였던 시절, 그녀들의 가녀린 팔뚝은 만화영화 주인공 ‘철인28호’보다 더 놀라운 괴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눈물겨운 노력에도 그들은 잠재적인 절도범으로 취급받았다. 돈의 다른 이름은 ‘의심’이 아닐까. 그들에 대한 의심은 폭언, 폭행으로 이어졌다. 사업주들은 삥땅을 없애겠다며 감시자를 승차시키고 안내양의 옷을 수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발명한 것이 계수기였다. 승객이 탈 때마다 밟으면서 숫자가 올라가도록 설계돼 승객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셀 수 있다는 것(경향신문 1978년 8월31일자 7면)이었다. 하지만 승객들이 발디딜 틈 없이 빽빽이 들어찬 버스에서 발판은 수없이 밟혔고 허수의 승객 숫자는 올라갔다. 완벽한 계측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시간은 변화를 만들고 변화는 많은 것들을 삼키는 재주가 있다. 세월이 흘러 버스 회수권과 토큰은 교통카드나 신용카드에 자리를 내주었다. 폐쇄회로(CC)TV가 눈을 부릅뜨고 버스 내 운전기사는 물론 승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대에 버스요금 삥땅은 언감생심이다. 버스 안내양은 버스요금 수금이 전자화되면서 사라졌다. 물론 시내버스 계수기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박종성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