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64년 2월17일 ‘사형수 5000번의 인간개조’

그는 27세 육군 상병이었다. 부대장 박모 중령 관사 사역이 그의 주 임무였다. 어느 날 “명태 몇 마리와 구두 두 켤레”(박 중령 진술)를 훔친 혐의로 6개월간 혹독한 영창살이를 했다. 복수의 칼을 간 그는 출소하자마자 박 중령의 집을 찾아갔다. 손엔 도끼가 들려 있었다. 새벽 1시를 조금 넘은 시간,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휘두른 흉기에 일가족 여섯명이 스러졌다. 어처구니없게도 희생자들은 박 중령 가족이 아니라 후임 부대장 가족이었다. 그는 범행 25일 만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1963년 가을의 일이다.

1964년 2월17일자 경향신문에 큼지막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형수 5000번’ 고재봉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살인귀(殺人鬼)’라 불렀다. 경향신문은 그가 기독교에 귀의해 매일 수기를 쓰며 깊이 참회하고 있다고 전했다.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직업소년학교를 다녔건만 어쩌다 끔찍한 범인이 되었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죽은 영혼이 살아날 리 없다.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어 혈관이 멈출 것 같다. 피해자 가족에게 내 살점을 면도칼로 한 점씩 오려내 육신을 바치겠다.’(1964년 3월7~14일 경향신문 연재)

그의 수기에는 온통 눈물과 탄식뿐이었다. 살인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혈관이 멈출 것 같은 고통, 살점을 도려내서라도 속죄하고 싶다는 그의 참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1964년 3월 그는 체포된 지 넉 달 만에 인천 부평 산골짜기에서 총살됐다.



대한민국 사법사상 최초 사형집행은 1949년 7월14일 있었다. 1997년 12월30일까지 모두 1310명이 사형됐다(사법연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부터 집행을 멈췄다. 그 덕분에 2007년부터 ‘사실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었지만 법률상 사형제도가 버젓이 남아 사형선고는 계속되고 있다.

사형은 인간의 생명권을 부인하는 잔인한 형벌이다. 사형제 옹호론자들은 사형제가 살인 등 흉악범죄를 억제한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연구들은 이 주장의 허구성을 밝히고 있다. 일례로 미국에선 사형제가 있는 주의 살인사건 발생률이 사형제가 없는 주보다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이 사형집행을 중단한 지도 어느새 18년째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사형집행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법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 유인태 의원 등 여야 의원 172명이 공동 발의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다. 사형제가 없어지면 피해자 가족의 한은 어떻게 하느냐는 반론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대답이 되겠다.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상관없이 사형은 용인될 수 없다. 사형은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이뤄주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돕는 것에 가깝다.”

문명국가는 범죄에 대해 신체의 자유 박탈로 대응해왔다. 목숨을 빼앗는 사형은 문명사회의 응보방식이 아니다. 법으로 생명을 지켜주는 나라, 사람을 죽이는 나라. 대한민국이 기로에 섰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