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88년 11월10일 정주영 회장 5공 청문회 증언

세상에 올 때 내 마음대로 온 것은 아니지만/ 이 가슴에 꿈도 많았지/ 내 손에 없는 내 것을 찾아/ 뒤 볼 새 없이 나는 뛰었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애창했다는 ‘별셋’ 트리오의 ‘보통인생’ 가사 일부다(경향신문 1990년 12월28일자). 마치 정 명예회장의 인생역정을 노래하는 듯하다.





정 명예회장의 일생은 뒤 돌아볼 새 없이 뛴 ‘특별한 인생’이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드는” 불굴의 정신으로 숱한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그가 세운 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뼈대를 이뤘고,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왕회장’에 등극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신념은 죽는 날까지 뒷방 늙은이로 남기를 거부했다.

엊그제는 그가 탄생한 지 100년 되는 날이었다. 곳곳에서 그의 기업가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모든 삶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고, 공이 있으면 과가 있다. 하여 한 생애는 영욕의 양면을 조명할 때 비로소 온전히 보인다. 정주영 명예회장도 예외는 아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불세출의 기업가임에 틀림없지만 ‘정경유착’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1988년 그는 5공 청문회(일해재단 비리 조사를 위한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나왔다. 11월10일자 경향신문은 정 명예회장이 청문회에서 일해(日海)기금 모금과정에 강제성이 있었음을 시인했다고 보도했다. 이 청문회에서 정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 이면이 드러났다. “각종 기부금을 근로자를 위해 쓰면 좋지 않았냐”는 추궁에 “우리는 수천억원을 근로자를 위해 쓰고 있다. 사회를 위해 그 정도 낸 돈은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시류에 순응해야 한다”고도 했다(11월11일자).

‘증인 정주영’을 신문하는 국회의원들은 비루했다. 야당 의원들조차 “회장님” “증인님”을 연발하며 굽실거렸다. 5공 청문회는 정 명예회장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정 명예회장은 정경유착을 넘어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함으로써 ‘정경일체’를 꾀했다는 점에서도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정 명예회장의 허물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의 공과 영광마저 폄훼되는 건 아니다. 그는 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스펙터클을 연출했다. 10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거쳐 군사분계선을 넘는 그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1998년 6월17일자).

정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함축하는 어록이 화제다. 그 중에서 최근 가장 많이 거론되는 말은 “이봐, 해봤어?”다. 일부에선 이 말을 절망하는 젊은이들을 비아냥거리는 데 써먹고 있다. 무엇을 해보고 싶어도 해볼 기회마저 없는 이들에게 이 말은 비수다.

정주영 정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해봐서 아는데” 버전에서 충분히 목도했다. “이봐, 해봤어?”를 들먹이려면 ‘흙수저’가 아니라, 기업가 정신을 내팽개친 일부 2세, 3세 ‘금수저’ 기업가들에게 할 일이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 jsal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