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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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중앙정보부의 개명 경향신문은 1980년 12월22일 ‘(내년) 1월1일부터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한다’고 보도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날 발표문에서 “안전기획부는 앞으로 그 명칭이 시사하듯이 대공업무를 비롯한 국가의 안전보장에 관련된 업무에 중점을 두어 이를 최우선적으로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1961년 5·16쿠데타와 함께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이름을 바꾼 것은 19년 만이다. 이러한 개명은 신군부의 정권 출범을 앞두고 중앙정보부가 10·26 사태 때 깊숙이 개입하면서 크게 실추된 기관의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4월, 갓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작고 강력한 정보기관을 내세우면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를 다시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개칭했다. 이와 함께 국정원장의 직급을 부총리에..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그해 여름은 참으로 뜨거웠다. 1983년 6월30일 밤, 한반도는 온통 눈물바다를 이뤘다. KBS의 특별생방송 를 통해 전해진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은 그야말로 핏빛이었다. “3일 하루만도 2백여 가족이 감격적인 상봉을 하는 등 4일 상오까지 모두 5백75 가족이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1983년 7월4일자 11면) 아버지는 30여년 전 헤어진, 이제는 중년이 된 딸을 부여안고 “네가 내 딸이구나” 울부짖다 졸도했다. 성도 모르고 얼굴도 까마득한 여동생의 왼쪽 어깨에 붉은 점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오빠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혈육과 생이별, 30여년 동안 만나지 못한 채 그리움만 쌓던 이산가족들의 상봉. “30여년을 뛰어넘는 통곡과 ..
1971년 3월 고리 원전 1호기 기공 “한국에서 처음 건설되는 원자력발전소 기공식이 19일 오전 11시 경남 동래군 장안면 고리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 국회의원, 주한 외교사절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42년 전이 1971년 3월 경향신문 1면에는 고리 원전 1호기 기공식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원전은 처음에는 돈이 들지만 세워지면 수력이나 화력보다 경제적”이라며 “20세기에서 가장 발전된 이 발전소를 갖게 된 것을 크게 자부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는 고리 원전 기공을 원자력 시대의 도래라며 크게 홍보했다. 기실 당시만 해도 원전은 ‘제3의 불’로 불리며 안전성, 경제성 등에서 최고의 에너지원으로 취급받았다. 원전론자들의 발언은 그 자체가 미래로 받아들여졌다. 원전 사업은 ..
1963년 태풍 셜리가 지나간 후 경향신문은 1963년 7월2일 “6월 태풍 셜리가 한국 남해안을 강타한 데 이은 전국적인 호우로 186명의 사망자와 이재민 6만2000여명, 25억원의 재산피해를 냈다”고 보도했다. 경남 장승포고교 후문 근처에서는 100m 야산이 무너지면서 인근 주택 20동을 덮쳐 80여명이 한꺼번에 몽땅 생매장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압사당한 주민이 101명에 달했다고 한다. 경향신문은 경남 함안군 이재민 수용소 르포기사도 게재, “월촌국민학교에 수용된 이재민 68가구의 경우 10부대의 밀가루와 15가마니의 보리로 연명해왔다”고 전했다. 68가구면 270명이 넘는다. 이 식량으로는 도저히 굶주림을 면할 수 없다. 이러다보니 죽도 아니고 보리밥도 아닌 음식을 (성인들은 양보하고) 어린것들 위주로만 먹여왔다는 안..
1980년 5월 ‘광주사태’ 발표 33년 전 오늘자 경향신문 1면에는「광주사태에 대한 계엄사 발표」가 실렸다. “계엄사는「광주사태」에서 민간인 1백44명과 군인 22명, 경찰관 4명 등 모두 1백70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민간인 1백27명, 군인 1백9명, 경찰관 1백44명 등 모두 3백80명이라고 밝혔다.”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 대한 계엄사의 종합 발표였다. 계엄군이 광주를 포위 고립시킨 채, 계엄사 공식 발표를 제외하고는 한 줄도 쓰지 못하게 언론을 통제하던 시절. 빛고을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계엄당국은 소요사태, 치안부재상태 등으로만 ‘광주’를 설명해왔다. 광주에서 들려오는 가공할 풍문 속에서 애를 끓던 시민들은 계엄사 발표를 접하고 경악했다. 수많은 실종자를 제외하고 민간인 희생을 축소한 ..
1977년 5월 대기업 횡포 “정부는 대기업 횡포로부터 중소 하청업체를 보호하는 한편 도급거래 질서 확립을 위해 불공정거래 행위지침을 마련, 시행키로 했다.” 1977년 5월2일 경향신문은 ‘도급거래, 대기업 횡포 규제’란 기사를 실었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가 제조위탁 및 수리위탁 부문에서 불공정거래를 할 경우 징역과 벌금을 병과키로 했다는 내용이다. 구체적인 규제대상으로는 하도급기업 경영에 대한 부당간섭, 계약물품의 수도 거절, 부당반품, 납품대금 후려치기, 대금지급 지연 등이 꼽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82년 4월19일에는 ‘중소기업 괴롭히는 강식(强食) 경영’이란 기사가 다시 게재됐다. 신문은 “대기업의 70% 이상이 납품대금을 늦춰 지급하고 있으며 대기업 중간관리자들이 반대급부를 바라고 고의로 지급기일을 늦추는 경우..
1973년 5월 일본인 싹쓸이 쇼핑 이번에는 일본인들의 해외관광 이야기다. 경향신문은 1973년 5월8일 4면에서 일본인들의 프랑스 파리 싹쓸이 쇼핑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파리에 몰려들어 호텔과 명품 가게들마다 일본인들로 넘쳐나고 있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 등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업소들의 정가표가 일본어로 바뀌고 루브르박물관은 일본인 안내원들을 채용했다는 게 보도의 요지다. “이들은 화장품, 장신구, 와인은 물론이고 부동산과 미술품, 골동품, 심지어는 경주용 말까지 거침없이 사들이고 있다”고 경향신문은 외신을 인용해 전했다. 또한 많은 상점들이 일본어 구사 점원을 구하기 위해 신문광고를 내고, 일본 식당들이 우후죽순으로 개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전국주조위원회 대변인은 “돈 많은 일본인들이 미국 및 영국인들과 더불어..
1990년 5월 골리앗 농성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하늘’로 올라갔다. “골리앗크레인에서 1주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은 고공농성 해제 전제 조건으로 공권력 철수를 요구, 현대중공업 사태의 전반적 해결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1990년 5월4일자 15면) 23년 전 세상을 들썩이게 한 현대중공업 사태. 현대중공업 노조는 구속 근로자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와 단체협상 불이행에 대한 각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해 4월25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정부는 공정한 중재의 권력이 아니었다. “경찰은 28일 새벽 6시를 기해 73개 중대 1만명의 병력과 해경 경비정 3척, 헬기 등을 동원해 현대중공업 정문 등 5곳과 4.5도크 입구 등 7개 방면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