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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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류성룡 그리고 이산해 조선시대에 인물 많기로 유명한 시기가 선조 때(1567~1608)이다. 이미 조선시대에 이 시기를 가리켜 ‘목릉성세(穆陵盛世)’라 했다. 목릉은 선조와 그의 부인들 무덤 이름이다. 이 시기에 임진왜란을 겪었으니 평화롭고 융성했다는 뜻으로 보기는 어렵고, 뛰어난 인물이 많았던 것을 뜻할 것이다. 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 중에서도 발군이었던 이들이 이이, 류성룡, 이산해이다. 이이(1536~1584)는 문과를 포함해 모두 9차례 시험에서 장원을 했다. 치른 시험마다 거의 수석을 했던 것이다. 29세인 1564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중간 책임자급인 호조 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이산해(1539~1609)는 당시 여러 면에서 이이 못지않았던 인물..
연금술은 우리의 적 지난번 낙랑군 위치를 둘러싸고 사이비역사학이 극성일 때 어느 국회의원이 우리나라 역사를 위해서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단다. 그러더니 이번엔 최고(最古) 금속활자로 기대(?)를 모았지만 학술적으로 아직 확인이 안 된 증도가자(證道歌字)를 놓고도 모 의원이 “국익 차원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진짜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우리끼리 쉬쉬하며 최고(最古) 문화유산을 양산해낸다고 무슨 국익이 된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황우석 사태 때도 국익을 위해서는 그냥 덮고 넘어가야지 그걸 우리끼리 폭로하냐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35년 제국일본 의회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국체명징(國體明徵·국가의 정체성을 밝힌다)’운동이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
기자, 검사, 그리고 대간 조선시대에 ‘대간’이라 부르던 관직이 있었다. 사헌부 관리를 대관(臺官), 사간원 관리를 간관(諫官)이라 했는데, 이 둘을 합하여 ‘대간(臺諫)’이라 했다. 또 사헌부와 사간원에, 이들의 상급관청에 해당하는 홍문관을 합해서 ‘삼사(三司)’ 즉 세 관청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중앙정부에는 대략 120~130개 관청이 있었는데 이 세 관청은 그냥 ‘삼사’라 불렸다. 이들 세 관청 관원을 언관(言官)이라고도 했는데 이들의 업무는 지금으로 치면 기자나 검사와 비슷하다. 대간이 명예롭게 여겨진 이유는 국왕과 대신들을 비판하고 견제하여 정치적 사회적 공공성을 추구하는 그들의 임무 때문이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에 규정된 사헌부와 사간원의 임무 규정은 간단하다.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고, 군주와 모든 관리의..
메이지 일본의 ‘성공’ 비결 일본 홋카이도 남단 하코다테에 가면 고료카쿠(五稜郭)라는 성이 남아 있다. 1868년 궁정 쿠데타로 천황을 빼앗기고 한순간에 ‘조적(朝敵·조정의 역적)’이 된 도쿠가와 막부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이다. 교토를 탈출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본거지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돌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천황군은 에도 코앞까지 진군해왔다. 일촉즉발, 인구 100만이 사는 에도 한복판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질 참이었다. 에도 총공격 하루 전 양측은 전격 합의했다. 쇼군은 항복하고 일개 다이묘(大名·봉건영주)로 내려가기로. 천황군은 에도를 무혈 접수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막부 가신들은 앙앙불락, 폭발 직전이었다. 이때 막부해군 총사령관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반발세력을 함대에..
우리 시대 억울한 ‘송익필’들 송익필(1534~1599)을 아시는가.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나서 당대의 8문장가로 손꼽혔다. 석학 성혼과 이이는 그와 마음을 허락한 사이였다. 그들의 우정을 증명하는 편지가 많이 남아 있다. 성혼의 에서 서너 통만 꺼내어 보자. “숙헌(이이)이 형의 편지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봉함을 뜯고 두 번 세 번 되풀이 읽었습니다.” 경신년(1560) 10월에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다. 성혼은 그를 학술모임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숙헌이 요즘 임진나루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다소 넓기에, 네댓 날쯤 문회(文會)를 열어 과 를 강론할 생각입니다. 형이 왕림하여 질정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1577년 윤8월) 3인의 대학자는 서로 편지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웠다. “형에게 보내..
사찰, 서원, 그리고 기업 조선시대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것들이 적지 않은데, 불교 탄압도 그중 하나이다. 조선 정부가 처음부터 불교를 억압하고 탄압했다는 말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건국 초기 조선에 한정한다면 적어도 종교적 신앙적 차원에서 새 왕조정부가 불교를 탄압하지는 않았다. 원칙주의자였던 세종대왕은 경복궁 안에 불당을 조성하기까지 했다. 조선 정부가 불교에 대해서 공격했던 것은 사찰들이 지배했던 엄청난 규모의 인력과 토지였다. 불교는 고려의 국가 종교였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에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기관은 불교 사찰이다. 왕조정부가 존중하는 기관이었기에 사찰 자산에 대해서는 많은 면세 혜택이 주어졌다. 바로 이점을 이용해서 조세 회피가 일어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A가 1만평의 땅을 가지고 있고, ..
일본을 대하는 법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은 일본사회를 약간 이상하게는 봐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아주 미워하면서도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내가 20여년 전 일본유학을 떠난다고 하니 친척어른들은 “일본 역사(간혹 왜X 역사라고 하는 분들도)에서 뭘 배울 게 있다고 유학을 가도 하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거기다 대고 나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해봤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컸다. ‘왜X’ 운운하는 친척어른들도 “물건은 일제가 최고”라며 도시바 선풍기 앞을 떠날 줄 몰랐고, 백화점이나 다리가 무너지자 “왜X들이 일제 때 만든 건 지금도 끄떡없어!” 하며 갑자기 일본 대변인이 되어 버리곤 했다. 일본에..
개혁과 보수의 경연(經筵) 풍경 권력자들은 자기네끼리 모여앉아 국가 현안을 토의하고 결정한다. 나는 평범한 시민이라, 한 번도 그런 모임에 낀 적이 없었다. 권력자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일까? 에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이야기가 쌓여 있다.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중종 때의 깨알 같은 기록이다. 개혁정치가 조광조 등이 참석한 경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어전에서 경전의 심오한 뜻을 캤고, 이것을 당대의 현실 문제와 결부시켰다. 잘은 몰라도, 지금의 권력자들도 중요한 회의 석상에서는 국내외 석학들의 이론을 인용하며 적절한 해결 방안을 강구하려 하지 않을까. 조광조가 정력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던 중종 13년(1518) 9월15일의 일이었다. 그날 경연 석상에서는 이란 경전이 화제였다. 길고 긴 그들의 토론을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