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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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아버지’ 이순신 1592년 5월23일(음력 4월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요토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머님, 우리 일본군은 곧 조선을 완전히 정복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이 되기 전에 명나라의 수도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의기양양했던 도요토미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조선에는 그의 야욕을 좌절시킨 한 장수가 있었다. 이순신이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을 원했고, 그러려면 수륙양면작전이 필수적이었다. 이순신은 일본 측의 전략을 정확히 읽었다.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전술과 전력 면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도요토미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침략전쟁이 ..
‘적폐 청산’의 함정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 인식이 많다. 민생과 관계없는 벼슬아치들끼리의 권력투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맞는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학계는 당쟁이 시작된 시기를 선조 즉위(1567) 무렵으로 보는데, 이 당시 조선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선조 앞 왕인 명종 때 조선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몹시 어지러웠다. 홍명희 소설의 주인공 ‘임꺽정’이 활약했던 시대이다. 문정왕후가 심약한 외아들 명종을 허수아비로 앉혀두고 20년 동안 권력을 전횡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생은 극도로 어려웠고, 정의로운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태도는 몹시 비판적이었다. 임꺽정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
정유반정 - 5월 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6세기 후 조선사에서는 두 번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이때 반(反)은 ‘반대한다’가 아니라 ‘돌아갈 반(返)’의 뜻이다. 정(正), 즉 올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연산군을 폐위한 중종반정(1506),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이다.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반정은 혁명(역성혁명, 즉 왕조교체)과 달리 왕조는 유지하면서, 무도한 통치자를 교체하기 위해 왕가의 다른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력은 물론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반정의 명분, 즉 여론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과 대왕대비의 윤허 등 승계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결격사유가 있다고 여겨지는 통치자를 교체했..
화가 고야의 무덤 앞에서 마드리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없다.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해양제국 스페인의 영광을 기념하는 초대형 박물관이 하나쯤 있을 법하지만, 그런 것이 없다.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박물관은 세 곳이다. 첫째는 프라도, 둘째는 소피아, 셋째는 티센 보르네미사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은 프라도로, 그 명성은 세계적이다. 이 세 박물관을 우리는 미술관이라고 부른다. 전시된 유물이 미술품 일색이라서 그러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술을 중히 여길까?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 답이 보인다. 근대 유럽 각국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 특히 그들의 조각과 그림을 모방했다. 스페인은 유독 심했다. 알다시피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또 그들은 대서양 무역시대를 열었던 만큼, 과거 지중해..
연산군이 쫓겨난 이유 당연히 조선시대에도 왕위 교체와 관련된 여러 번의 정치적 격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신하들이 재위 중인 왕을 몰아내고 다른 왕을 세운 일이 적어도 두 번 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과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이 그것이다. 똑같이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광해군과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르다. 광해군은 말 그대로 공로와 실책이 함께 있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그는 누구 못지않게 공로가 컸다. 또 전쟁 후 명나라와 청나라의 갈등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적 조치를 취했다. 국내 정치에서 상당한 실책을 범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그에게는 평가받을 만한 점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인조반정이 불가피했던가에 대해서는 당대는 물론 지금도 이견이 있다. 반면에 연산군은 도대체 좋게 ..
천황과 탄핵 1988년 9월19일 일본 천황(국내 신문에서는 일왕으로 표기하지만 여기서는 천황이라고 쓴다) 히로히토(裕仁)가 병석에 눕고 이듬해 1월7일 사망하기까지 벌어진 일에, 세계도 놀랐고, 일본인도 놀랐다. 2차 대전의 패전으로 일본 사회의 전면에서 사라진 듯 보였던 천황의 죽음에 일본인들이 돌연 ‘1억 총자숙(總自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신문 1면에는 마치 날씨 예보처럼 천황의 맥박, 체온수치가 매일 실렸고, 방송국은 쇼, 예능프로는 물론 CF마저도 중단했다. 거리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심지어 우리의 노량진시장에 해당하는 쓰키지 수산시장의 상인은 텔레비전에 나와 장사를 자제하고 있다며, 왜 그러냐는 질문엔 ‘글쎄요…’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음~ 일본인이니까요”라고 답하던 장..
귄터 그라스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취미 하나가 늘었다. 세계를 움직인 예술가와 학자, 정치가를 직접 만나는 일이다. 직접이라고 했지만 실은 인터넷을 뒤져 그들과의 인터뷰 동영상을 감상하는 것이다. 엊그제는 20세기의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의 진솔한 자기고백이 이어져 정말 감동적이었다. 노년의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직업이 네 가지라고 했다. 작가이자 화가, 조각가이자 노벨상 수상자라고 말하였다. 도시빈민 출신이라서 그는 대학을 다니지 못했다. 삽화가를 기르는 미술학교를 겨우 졸업했을 뿐이다. 학창시절에 조각도 배웠기에,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직업이 ‘노벨상 수상자’라니, 어찌하여 그것도 직업이 될 수 있는가? 그라스의 설명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자로 사는 것이 부럽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
개혁의 시작은 ‘신뢰’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 중 하나는 대동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할 수 있는 개혁 중 가장 큰 개혁은 세금 개혁이다. 기득권 집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여러 번 힘든 고비가 있었지만,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 조정은 백성의 신뢰를 되찾았고, 결과적으로 왕조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대동법 성립에 긴 세월이 걸린 것은 사회의 변화 속도가 느린 전근대사회에서 진행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 재벌 개혁이나 비정규직 문제가 그렇듯이 대개 큰 사회 개혁은 성공을 장담할 수도 없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수십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다. 100년에 걸친 대동법 성립 과정에서 성공의 단서가 마련된 결정적인 한 순간을 지적한다면 1650년(효종 1년) 1월21일 무렵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