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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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시행 기념비 요즘 언론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증세’이다. 새 정부가 연일 여러 국정과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들에 대개 큰돈이 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 정부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국정과제 해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개 공감하지만, 증세는 환영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도 내년 선거를 앞두고 과감하게 밀어붙이기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라면 적어도 두 가지가 가능해야 한다. 이 말은 그 두 가지를 제대로 못 하면 국가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국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세금을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야말로 국가의 본질적 기능이다. 정약..
조선식민지화의 세계사적 특수성 도쿄 유학 시절 곧잘 대만 친구들하고 어울렸다. 대만도 일본 식민지였기에 ‘같은 편’인 줄 알고, 일본 욕을 하며 맞장구를 기대했다가 김이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별반 ‘반일감정’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사람들도 식민본국에 대해 썩 유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강렬한 적개심을 표출하는 건 별로 못 본 것 같다. 그럼 우리가 특이하다는 건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위안부, 강제징용을 비롯한 일본의 악행이 가장 큰 이유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 왔던 조선 식민지화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공유하고 교류를 해온, 같은 문화권의 이웃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는 점이다. 영국-인도·미얀마, 네덜란드-인도..
우리 시대의 역사가와 메시아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나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마침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의 글에서 흥미로운 글귀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334쪽, 1940) 벤야민이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한 것은 역사서술이다. 역사가의 실천적 활동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벤야민은 우리에게 익숙한 실증주의 또는 근대역사학자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근대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는 일찍이 말하였다. “그것이 본래 어떠했는가를 서술하는 것이 역사연구의 본질이다.” 벤야민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그럼 어떠해..
사관들의 붓 한 자루 에 민인생이라는 사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태종이 신하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오고 있었다. 뒤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민인생이 끼어있는 것을 태종이 보았다. 태종이 내시에게 눈짓으로 그가 왜 왔는지 알아보라는 신호를 보냈고, “신이 사관으로서 감히 직무를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1년 3월18일). 태종은 민인생을 알고 있었고, 그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에 이 기사가 실린 것은 민인생도 태종이 자신을 불편해하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한 달여 뒤 민인생 관련 기사가 또 나온다. 태종이 편전에 있는데 민인생이 편전 뜰에 들어왔다. 태종이 그를 보고는 “사관이 어찌 들어왔는가?” 묻자, 민인생은 전에 허락하신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종은 편전에는 들어..
지정학적 지옥 한국, 지질학적 지옥 일본 도쿠가와 시대(1603~1868) 일본인들은, 조선은 나약하여 숱한 외침을 받았고, 타국에 복속되기를 밥 먹듯 했다고 비아냥거렸다. 반면 일본은 다른 나라에 침략당한 적도 없고, 전쟁에 져서 속국으로 전락한 적도 없다고 으스댔다. 일본은 ‘불하지국’(不瑕之國·흠이 없는 나라)이라는 것이다. 한반도는 역사상 1000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일본은 놀랍게도 딱 두 번이다. 한번은 13세기에 몽골군이 송나라, 고려 사람들을 동원해서 북규슈에 침입했다가 태풍으로 패퇴한 적이 있고, 또 한 번은 태평양전쟁 때의 미군이다(고대의 신라해적이나 여진족 침입 등 소소한 것은 제외). 놀라운 수치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지척거리에 있지만, 그 지정학적 조건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큰 자연재해 없는 한..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내 생각에 정조 임금은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정책에 다소 진보적인 면도 없진 않았다. 영세 상인들에게 생업의 기회를 보장하고, 길가에서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준 것이 그러했다. 그러나 대체로 정조는 옛 제도의 답습에 머물 때가 많았다. 가령 규장각을 두어 집현전을 모방한 것이며, 조선 태종 때의 신문고 제도를 모방하는 식이었다. 좀 더 알고 보면 정조는 성리학의 가르침에 매우 충실한 왕이었다. 조선의 군주 27명 가운데 정조는 문집을 저술한 유일한 왕이었다. 라는 왕의 문집은 무려 184권의 거질이다. 하지만 정조는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하지 않았고, 자력으로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려는 의지도 빈약했다. 그가 순수한 고전적 문체를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취지로 추진한 ‘문체반정’ 같은 것은, 더 말할..
성리학 2.0 아마도 일종의 직업병 탓이리라. 필자 눈에는 요 몇 해 동안의 한국이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어느 시기의 조선처럼 보인다. 그 시기에 조선은 첫 번째 조선에서 두 번째 조선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산통을 겪었다. 건국(1392) 이후 약 두 세대 동안 조선의 중앙권력은 엄청난 성취를 이뤄냈다. 그 한가운데에 빛나는 세종 시대가 있다. 기간산업인 농업에서 이룬 높은 경제 발전으로 민생이 안정되고, 세금과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국가제도가 정비되었다. 훈민정음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성취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했던 이념이 성리학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를 최고의 사회적 가치 기준으로 삼아 사회제도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놀라운 성취에 가려서 주목되지 않지만 15세기 중반..
손정의가 료마에게 배운 것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孫正義·손 마사요시)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다.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아는 유명인물이다. 손정의는 15살 때 료마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한글번역본 시바 료타로, 박문수 옮김, 인터넷에선 NHK 대하드라마 을 한글자막으로 감상할 수 있다)를 읽고 감격하여 미국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각혈을 하며 병석에 있었고, 가족의 생계는 막연한 때였다. 어머니도, 친척도, 담임 선생님도, 친구들도 미국행을 말렸고, 듣지 않자 욕을 했다. 그러나 손정의는 미국행을 단행했다. 손정의는 이것이 자기 인생의 첫 번째 승부수였으며, 료마의 ‘탈번(脫藩·봉건영지인 번을 떠나 낭인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