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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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없는 일본, 민심의 나라 한국 촛불시위를 전하는 일본 텔레비전들이 요란하다. 가장 놀라는 건 역시 참가자 수. 출연자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거기에 태극기집회까지 더해지니 “에? 더 있었어?” 하는 반응). 카메라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면서 입들은 더 벌어진다. 유창한 정치발언이 난무하는 건 그렇다 쳐도, 가장무도회를 방불케 하는 시위의상과 퍼포먼스, 한 패널이 부러워한다. “마치 한바탕 놀이 같네요.” 그러자 나이 든 사람이 피식 내뱉는다. “역시 데모 대국.” 한국의 시위규모에 일본인들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0세기 일본 최대 시위라는 1960년 안보투쟁 때 도쿄에 모인 수는 주최 측 추산으로도 30만명을 웃돌 뿐이다. 그 후 최대 시위였던 2015년 안보법안 반대 시위도 10만명 정도였다. 도쿄 인구는 이 기간에 ..
돈키호테 멀리 스페인을 다녀왔다. 여행 중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 건망증 탓에 금세 다 잊었다. 뇌리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은 겨우 두어 가지뿐이다. 우선 인구에 관한 소감을 적어보자. 스페인 면적은 한국의 5배 이상이지만 인구는 4800만명에 불과해, 우리보다 300만명이 적다. 비행기가 스페인 북부 지방을 지날 때부터 실감이 났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듬성듬성한 마을풍경이 더없이 한가로웠다. 스페인의 인구밀도는 한국의 5분의 1에 못 미친다. 1㎢에 평균 470명이 살아야 하므로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람 값은 헐하고 물건 값은 턱없이 비싼 것이 당연하다. 우리도 스페인만큼 성긴 인구밀도를 갖게 될 날이 있을까? 그렇게 되면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풀릴 것이다. 주거, 환경, 취업 문..
왕의 측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사극에 국왕이 가까운 신하와 독대하는 장면이 가끔씩 나온다. 이런 일은 조선시대에 실제로 가능하지 않았다. 국왕은 복수의 사람들에게 늘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각자의 임무와 성격이 달랐는데, 그 임무와 성격의 구성이 조선왕조 권력의 단면을 보여준다. 왕 주변에는 크게 5개 그룹이 있었다. 왕이 심정적으로 가깝게 느끼는 순서로 따지면 내시, 승지, 대신, 언관, 사관이 그들이다. 내시(內侍)는 원칙적으로 국왕의 사적 요구에 응하는 존재였다. 국왕의 개인적 사정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왕에게 ‘노(No)’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에게는 어떤 공적 역할도 맡겨지지 않았다. 국왕에 대한 사적인 보필 이외에 그들은 아무런 책임도 요구받지 않았다. ..
한국의 개인, 일본의 개인 몇 해 전 안식년으로 교토대학에 체류할 때의 일이다. 대학 구내식당에 가보니 몇몇 식탁의 한가운데에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식탁 양쪽에서 학생들이 칸막이벽을 마주하고 각자 우적우적 밥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면벽참선도 아니고, 면벽식사라! 하도 기이해서 일본인 교수에게 연유를 물어봤다. 대답인즉, 모르는 사람과 눈 마주치는 게 싫어 화장실에서 식사하는 학생들이 늘어나, 대학당국이 이런 조치를 내놨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 사회가 우리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한다. 혼자 밥 먹고 술 마셔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 없고, 기괴한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고…. 우리보다 훨씬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그러나 이건 큰 오해다. 사회나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고,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허하라 광대들이 궁중에 들어와 놀이판을 벌였다. 그들은 화려한 언변과 포복절도할 몸놀림으로 세상사를 풍자했다. 이런 일이 중세 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도 이따금 연출되는 장면이었다. 따지고 보면 왕은 구중궁궐 깊은 담장에 갇힌 가련한 존재였다. 왕은 광대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 이야기에 반신반의하면서도 흥미를 느꼈다. 16세기에 어숙권이 쓴 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중종 때였다. 광대들이 임금님의 안전에서 어느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비행을 극으로 재연했다. 19세기의 실학자 최한기는 그날이 설날이었다고 서술했다. 극 중의 탐관오리는 화려한 말안장을 탐했다. 그는 상인을 불러 관청 뜰에서 가격을 흥정하였다. 공무를 봐야 할 곳에서 사적인 거래를 했으니, 법률위반이었다. 그건 그렇다 ..
시민과 선비 국가 권력과 민의 관계에서 정당성을 따진 것은 서양보다는 중국과 한국이 앞선다.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중국의 당나라와 우리의 고려시대부터는 그 관계에 대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논리들이 나타났다. 조선시대 왕의 공부기관인 경연(經筵)에서 많이 읽힌 책으로 가 있다. 당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태종이 그의 재상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제왕학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실려서 더욱 유명해진 말 중에 임금과 백성의 관계를 갈파한 구절이 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성공적인 권력 운영은 백성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학을 통치 원칙으로 내세웠다. 유학에서는 권력의 정당성을 신(神)이나 무력이 아..
소용돌이의 한국, 상자 속의 일본 “일본에서 음식 차리는 것을 보면 밥은 두어 홉을 넘지 않고 반찬도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아 몹시 간소하다. 다 먹으면 다시 덜어서 먹기 때문에 남기는 일이 없다. (중략) 여름에 파리와 모기가 매우 드문데, 이는 실내가 정결하고 지저분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길가에서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질서정연하고 엄숙한 분위기라 떠드는 사람이 없다. 인파가 수천 리 길에 이르렀는데 단 한명도 제멋대로 행동하여 행렬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20여년 전 일본 유학을 갔을 때 일본의 인상이 딱 이랬다. 일본을 가보신 독자들도 비슷한 인상을 갖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이건 내 얘기가 아니고 1719년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신유한(申維翰)이 한 말(이효원 번역 )이다. 질서를 잘 지키고 줄을 ..
임금의 자리는 가볍다 까마득한 왕조시대에도 그런 말이 있었다. ‘모든 권력은 시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 조항 같은 것은 아직 상상 밖의 일이었으나, 권력의 기본적인 작동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소통을 거부하는 권력, 소수에 불과한 기득권층의 이익만 챙기는 권력자들은 쓰러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민심을 떠나 표류하던 18세기의 한국 사회, 그때도 비판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이형상은 바로 그런 이였다. 라는 그의 글을 읽다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많은 문집을 읽어보았지만, ‘군경(君輕)’, 곧 임금 자리를 가볍게 여겨야 한다는 주장을 여과 없이 쏟아낸 글은 처음이었다. “임금 자리는 지극히 어렵게 여겨야 할 자리다. 위험한 것은 (민심의) 강물이 아니겠는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성이 아니겠는가. 강폭은 너르고 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