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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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아닌 임금, 덕종 최근 오랜만에 낭보가 들렸다. 문화재청이 미국 시애틀박물관이 소장 중이던 ‘덕종어보’(사진)를 기증받았다는 소식이다. 한데 덕종이 누구인가. 아무리 ‘태정태세 문단세…’를 꼽아도 ‘덕’자는 없으니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본래는 왕이 아닌데 죽은 뒤에 높임을 받은 추존왕(追尊王)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임금 대우 국왕’이다. 덕종(1438~1457)은 만 19년을 살았을 뿐이지만 만만치 않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우선 세종이 자신의 무릎에 앉혀 키웠을 만큼 가장 사랑한 손자였다. 또 세조의 맏아들이자,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의 친아버지이며, 지금까지 숱한 사극의 주인공이 된 인수대비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 또한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어린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아버지(세조)..
여왕이여! 망하리라!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부윤사바하(鳧伊娑婆訶)”() 888년(진성여왕 2년)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수수께끼 같은 글이 퍼졌다. 는 ‘벽서(榜)가 걸렸다’고 했고, 는 ‘전단이 뿌려졌다(書投路上)’고 했다. ‘다라니의 은어’로 쓰여진 글은 요즘의 패러디물을 쏙 빼닮았다. 는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소판’은 여왕의 애인인 각간 위홍을, ‘부윤’은 여왕의 유모인 부호를 가리킨다”(사진)고 했다. ‘나무(南無)’는 절대적인 믿음을, ‘사바하’는 앞의 내용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벽서(혹은 전단)는 “신라는 망한다! 여왕과 (국정을 농단하는) 위홍과 부호 등 때문에 망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신라는 이후 47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15..
‘공자왈’ 판결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얼마 전 서울고법 김상환 부장판사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사건 항소심에서 원세훈 전 원장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공자왈(孔子曰)’을 인용했다. ‘위정’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 즉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문제는 김 판사의 ‘공자왈’ 해석은 고금을 통틀어 ‘소수의견’이라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주자(1130~1200)의 해석이다. 주자는 ‘공(攻)’을 공격의 攻이 아니라 전공한다는 뜻의 攻으로 풀었다. 攻자 하나를 두고 상반된 해석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단은 성인의 도(道)가 아니라 양주(개인주의), 묵적(이타주의),..
해인사 지킨 빨간마후라 합천 해인사에는 고려대장경판을 본뜬 비석이 서 있다. 2002년 조성된 ‘김영환 장군(사진)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이다. 그가 누구이기에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빛나는 고려대장경을 지켰다는 것일까. 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18일로 돌아간다.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장이던 김영환 대령은 합천 상공으로 출격하라는 명을 받는다. 해인사와 그 주변에 집결한 북한군 낙오병 900여명을 소탕하라는 것이었다. 김영환 편대의 임무는 지상 경찰전투부대가 제시한 목표지점을 정확히 폭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벌어졌다. 경찰전투부대가 찍은 폭격지점이 북한군 병사들이 대거 숨어든 해인사 경내였다. 만약 폭탄과 로켓탄, 네이팜탄까지 투하하면 해인사는 물론 고려대장경은 불바다가 될 것이 뻔했다. 갈등하..
선비가 색동옷을 입은 까닭 농암 이현보(1467~1555·그림)는 ‘어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안다면 그를 너무 모르는 것이다. 퇴계 이황이 쓴 농암의 일대기를 보라. “이현보는 자손들이 다 모인 가운데 부모님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 ‘이현보 행장’) 환갑을 훨씬 넘긴 이현보가 왜 노부모 앞에서 꼬까옷을 입고 재롱잔치를 벌였을까. 춘추시대 초나라 은사인 노래자의 고사가 여기서 나온다. 노래자는 나이 70이 넘었음에도 때때옷을 입고 딸랑이를 흔들고 아이들처럼 놀면서 부모를 즐겁게 했다. 한번은 부모에게 물을 갖다 주려다 넘어진 일이 있었다. 노래자는 부모가 걱정할까봐 일부러 물을 더 뿌린 뒤 드러누웠다. 어린아이 우는 흉내를 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는 아이들의 장난인 줄 알고 기뻐했다...
‘황희 스캔들’ “아니야.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얘기야.” 1452년(단종 즉위년) 7월 을 편찬하려고 사초(史草)를 들춰 보던 지춘추관사 정인지가 깜짝 놀랐다. 세종 때의 사관 이호문이 ‘황희 정승’을 주제로 쓴 사초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황희가 대사헌 때 승려 설우에게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대사헌’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황희가 곤경에 처한 나머지 “도와달라”고 찾아온 역적(박포)의 아내와 간통했다는 대형 스캔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또 황희가 “매관매직했으며, 자신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했다”고까지 기록했다. 정인지는 황보인 등 편수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황희의 오랜 지기였던 우리도 모르는 내용인데…. 중상모략이 틀림없어요. 간통 사건만 해도 ..
궁녀와 환관의 ‘슬픈 언약식’ “궁녀 내은이가 임금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옥고리)’를 훔쳐 환관 손생에게 주고 서로 언약했다.(相與爲約)” 1425년(세종 7년) 서로 사랑했던 궁녀와 내시의 ‘슬픈 언약식’을 기록한 기사이다. 풋사랑의 대가는 참혹했다. ‘임금의 여인’인 궁녀가 환관과 사랑을 나누고, 게다가 임금의 물건까지 훔쳐 주었기 때문에 남녀 모두 참형을 받았다. 1453년(단종 1년) 궁녀 중비는 어린 별감 부귀에게 연정을 품었다. 15세도 안된 어린 중비는 친구 2명과 함께 글을 아는 시녀 월계를 찾아가 부귀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부탁했다. “대궐은 넓고 적막한데 한번 만나뵈면 어떨까요.”() 이 연애사건은 궁녀와 별감의 3 대 3 단체미팅으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이들이 맺은 봄날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임금의..
세종, 성병에 걸렸다? “이제 또 임질(淋疾)을 얻은 지 11일이 되었다. 번다한 정무를 처리하면 기운이 노곤하다.” 1438년 의 ‘망측한’ 기록이다. 세종은 ‘임질’ 때문에 국가의 주요행사인 “강무(講武·임금이 지휘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의 주관을 세자(문종)에게 맡기자”고 할 정도로 통증을 호소했다. 41살이던 1438년부터 4년간이나 임질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과 여말선초의 대학자인 권근도 임질 때문에 경연에 나서지 못했거나 사직을 청했다. 임질이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의 은 ‘성접촉으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는 성병’이라 설명한다. 그렇다면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은 물론 성종과 권근 등이 모두 스스로 성병에 걸렸음을 토로한 것이 된다. 과연 성병이 맞을까. 아마도 천하의 난봉꾼이었던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