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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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들을 위한 변명 “천하의 권세를 쥔 자는 첫째가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그의 내연녀인) 객(客)씨이며, 셋째가 황제(희종)이다.” 1624년(인조 2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은 에서 명나라의 여론을 전하고 있다. 환관 위충현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던 희종의 유모(객씨)와 손잡고 국정을 쥐락펴락한다는 것이다. 황제의 권력서열은 3위 정도라는 것이다. 명나라 백성들은 위충현이 지나가면 황제(‘만세’)에 비견되는 ‘구천구백세’를 연호했단다. 심지어 위충현을 ‘감히’ 공자와 견주고, 살아있는 그를 위해 ‘사당’까지 조성했단다. 환관 유근(1451~1510)도 만만치 않았다. 황제(무종)를 환락에 빠뜨리면서 국정을 농단했다. 심지어 대신들을 뙤약볕에 하루 종일 세워놓는 ‘단체기합’까지 줬다니…. 하지만 군주의 총애가 ..
인간백정의 역사 “시골에서 집행하면 누가 알겠는가. 본보기를 위해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에 처하고 사지를 각도로 조리돌려라.” 1407년(태종 7년) 태종은 충청도 연산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여자에게 극형 중의 극형을 내렸다. 1728년(영조 4년),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에서는 소름 끼치는 의식이 벌어졌다. 난을 일으킨 이인좌 등의 수급(참수된 목)을 받는 승리의 의례였다. 숭례문 앞은 끔찍한 광경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조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죄수들의 목을 베 그 시신들을 저잣거리에 내다버리는 기시(棄市)의 법으로 처벌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예외없었다. 칼로 부모와 형, 그리고 고을 수령까지 상해를 입힌 자에게 ‘기시’의 형을 내렸다.(1438년) 형조가 ‘..
조선판 4대강 공사 “안흥량(충남 태안의 마도 해역)의 바닷길은 파도가 격랑하고 바위가 험준해서 배가 뒤집힙니다. 운하를 뚫어야 합니다.”( ‘세가·인종’) 1134년(인종 12년), 긴급 상소문이 올라온다. 나라의 곳간을 채울 세곡(稅穀)을 개경으로 운반하려면 안흥량 해역(사진)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해역은 섬들이 흩어져 있고, 수중암초가 지뢰처럼 깔려있으며,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물살이 요동치던 곳이라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다. 결국 천수만~가로림만을 뚫는 운하공사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토목공사는 실패로 끝났다. 고려조 운하공사는 이후 두 차례(1154년·1391년)나 이어졌지만 모두 미완성으로 끝났다. 공사구간이 암반층인 데다 조수가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파는 대로 메워진 것이다. 조선..
삼전도비의 굴욕사 “여러분이 좀 나서 주셔야겠소.” 1637년(인조 15년) 11월, 인조가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청나라가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에 ‘청태종 승첩비’를 세우라”는 칙서를 보내 조선을 핍박한 것이다. 다급해진 인조는 몇몇 신하들을 불러 “비문 좀 쓰라”고 청했다. 그러나 누가 손들고 나서겠는가. 누구는 칭병(稱病)으로, 또 누구는 일부러 거친 글로 피해 나갔다.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 등 두 사람의 글을 택해 청나라로 보냈다. 청나라는 ‘황제의 공덕을 더 서술하는’ 조건으로 이경석의 글을 낙점했다. 임금은 “나라의 존망이 경에게 달려 있으니 좀 고쳐 쓰라”고 이경석을 다독거렸다. 이로써 삼전도비문(사진)이 완성됐다. “(조선이) 미욱하여 재앙을 불렀는데~우리 임금이 복종하여~황제의 은혜 덕분에 국토가 ..
“영조가 형을 죽였다” “김일경은 임금 앞에서도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국문장에 끌려나온 김일경과 목호룡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왕세제(영조·사진) 시절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이다. 김일경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극력반대했던 소론의 핵심이었다. 목호룡은 경종독살시도사건(1722년)을 폭로하면서 역적의 수괴로 왕세제를 지목한 인물이었다 . 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오른 영조와 노론 측이 이들을 국문장으로 끌어낸 것이다. 두 사람은 당당했다. 김일경은 “나(吾)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自視靑天白日)”면서 “선대왕(경종)의 빈전 앞에서 달갑게 죽겠으니 시원하게 죽여달라”고 했다. 목호룡은 “죄가 있다면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다는 죄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1725년 1월에는 이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