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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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호랑이의 트로피 사냥 구한말 조선을 다녀간 서양인들은 조선호랑이를 신기한 듯 다퉈 소개했다. “날개 달린 호랑이가 불을 뿜어내고…. 땅과 공기와 하늘의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있다”(윌리엄 그리피스의 )는 따위의 글들이다. 그래서인지 당대 서양의 ‘트로피 사냥꾼’들이 대거 몰려왔다. 마치 요즘의 아프리카 사자 사냥꾼처럼…. 커밋 루스벨트와 영화 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로이 채프먼 앤드루 등은 조선 호랑이 사냥에 나섰던 명사들이다. 뭐니뭐니해도 조선 호랑이(그림)의 멸종을 주도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예로부터 호랑이 사냥은 일본인들에게 ‘로망’이었다. 섬나라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생태계의 정점은 늑대가 차지했다. 임진왜란 때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호랑이를 사냥한 일은 대륙침략의 향수를 자극하는 자료로 활용됐다. ..
큰절과 고두의 차이 1883년 9월18일 미국 뉴욕의 피브스 에버뉴 호텔에서 역사적인 이벤트가 열렸다.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조선보빙사가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는 행사였다. 이때 진기한 사건이 벌어진다. 아서 대통령을 알현한 보빙사가 민영익의 지휘 아래 일제히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한 것이다. 지위에 따라 형형색색의 관복을 차려입고 큰절을 올리는 모습과, 그 장면을 보고 순간 당황한 아서 대통령의 어정쩡한 표정이 미국 언론의 이목을 끌었다(사진). “이런 인사는 국왕이나 타국의 국가원수를 알현할 때에만 한다. 그외엔 결코 하지 않는다”(‘뉴욕헤럴드’ 1883년 9월19일). 이는 1860년 미국을 방문했던 일본사절단이 선 채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인사하고 악수했던 것과는 천양지차의 예절이었다. ..
직언과 배신 사이 “아첨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한다. 간쟁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사진).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성호 이익은 “바른말을 하고 극진하게 간언하는 신하야말로 국화(國華·나라의 권위와 위엄)”()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직언, 즉 곧은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 장령 신숙주는 “언로(言路)는 인체의 혈맥과 같은 것”이라면서 “언로가 뚫리지 않으면 나라에 큰 병이 생긴다”고 했다.() 여말선초의 대학자 권근은 “지나친 직언을 했다 해서 벌을 주면 언로가 막히고 결국 나라와 군주는 멸망에 이른다”고 했다(). 그랬기에 역대 군주들은 과할 정도로 직언을 구했고, 신하들은 죽을 각오로 군주를 다그쳤다. 직간의 ‘끝판왕’은 한나라 창업공신인 주창이었다. 주창은 황제(고조 유방)..
하멜이 박연을 만났을 때 “제발 우릴 풀어달라고 해주시오”(하멜), “날개가 있다면 몰라도 조선국법으로는 안됩니다”(박연). 1653년(효종 4년) 10월29일 제주 관아에서 진풍경이 연출됐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네덜란드인들의 상봉 드라마가 펼쳐졌다. 두 달 전인 8월16일 풍랑을 만나 겨우 살아남은 헨드릭 하멜 일행(36명)이 1627년 조선땅에 정착한 박연(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을 만난 것이었다. 윤행의 는 조선 귀화 26년 만에 고국사람들을 본 박연은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연은 이미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아니었다. 하멜은 “벨테브레이가 모국어를 잊어버린 탓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사진)며 당황해했다. 사실 벨테브레이 역시 동료 2명과 함께 식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
조선에 전깃불이 켜진 날 “듣도 보도 못한 불이어서 공포감마저 들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환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887년 1~3월 사이 어느 날 경복궁에서 전깃불이 켜진 밤의 풍경이다(사진은 경복궁 내 전기발상지 발굴지).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봤다는 안 상궁은 이를 ‘불가사의한 불’이라 했다. 바람에 건들거리며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전등불을 ‘건달불’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경복궁 전깃불 점등은 1879년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지 불과 8년 만의 일이니 얼마나 신기한가. 고종이 전기에 관한 한 엄청난 ‘얼리어댑터’가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고종은 임오군란 및 갑신정변 이래 밤에 병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명했다”(황현의 ..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부부를 모신 영원(英園·경기 남양주 홍유릉 경내)이 45년 만에 공개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영친왕이나 이방자(일본명 마사코)나 정략결혼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음은 분명하다. 그래도 두 사람의 혼백만은 함께 묻혀 있지 않은가. 이 결혼 때문에 61년간이나 독신으로 살았던 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1897~1968·사진)이다. 민갑완은 10살 때인 1907년 대한제국 황실의 초간택에서 150여명의 규수 가운데 수망(首望·1순위)으로 뽑혔다. 동래부사 민영돈의 딸이었던 소녀는 영친왕과 생년월일까지 같았다. 간택자리에서 영친왕과 키를 재보고는 ‘남자가 왜 이리 작냐’고 속으로 투덜거렸단다. 그러나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에 이끌려..
이승만 저격사건 ‘범인은 62살 유시태, 선동은 69살 국회의원 김시현….’ 최근 1952년 6월25일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사건의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 공개됐다. 6·25 2주년을 맞아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의 뒤에서 유시태가 총을 겨누기 직전의 사진이었다. 사건은 권총 불발로 미수에 그쳤다. 의열단 출신의 독립투사 두 사람이 벌인 저격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호호백발의 두 노인은 왜 이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괴뢰의 도발이 예상됐는데도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혼자 살자고 도망갔으며, 끝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또한 국민방위군 같은 사건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김시현(사진)은 8월22일 열린 공판에서 “이 대통령은 할복자살하기 전에는 대중..
신립 장군을 위한 변명 “신립(1546~1592)은…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다.”(류성룡) 서애 류성룡은 (사진)에서 충주전투에서 대패한 신립 장군을 두고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군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폄훼했다. 명나라 이여송은 “천혜의 요새지(조령)를 몰랐으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였다”고 촌평했다. 심지어 1801년(순조 원년) 탄금대를 지나던 다산 정약용은 “신립을 깨워 ‘왜 문(조령)을 열어 왜적을 받아들였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신립이 천혜의 요충지라던 조령(해발 642m) 대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대패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렇지만 궁금증에 생긴다. 조선의 종묘사직을 위기에 빠뜨린 책임을 신립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신립은 여진족의 침범을 막아낸 용장이었다(15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