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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탯줄을 모신 이유 “태(胎)를 묻는 풍습은 신라 때 시작됐다. 중국의 풍습은 아니다.”() 1570년(선조 3년) 선조 임금의 태(태반과 탯줄)를 다시 잘 모셔야 한다는 의론이 일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강원도 춘천, 황해도 강음 등 후보지를 찾아 대대적인 공사를 펼쳤지만 그때마다 돌발변수가 생겨 중단되곤 했다. 후보지마다 다른 사람의 태항아리가 발견된 것이다. 그럼에도 공사를 강행한 황해관찰사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했다. 선조의 태는 우여곡절 끝에 임천(충남 부여)에 묻혔다. 그렇다면 왜 조상들은 중국의 예법을 따르지 않고 태를 묻는 풍습을 이었을까. “사람이 현명할지 어리석을지(賢愚), 잘될지 못 될지(盛衰)가 모두 탯줄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잘 보관해야 한다”는 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은 “탯줄이 좋..
퇴계는 왜 ‘낮퇴계, 밤토끼’였나 퇴계 이황(1501~1570·그림)은 조선을 대표하는 도학자다. 즉 하늘의 이치를 따르며 인간의 욕망을 없애는(存天理 滅人慾) 학자였다.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은 퇴계를 공자와 주자의 뒤를 잇는 성인이라는 뜻에서 ‘이자(李子)’라 받들었다. “퇴계를 ‘이자’라 높인다 해서 딴죽을 걸 이는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민간에서 전승된 구비설화를 보면 퇴계는 반전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퇴계가 낮에는 점잖게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밤에는 부인에게 토끼같이 굴었다”는 ‘낮퇴계 밤토끼론’이다. ‘퇴계 주인공’의 음담패설 설화는 한둘이 아니다. 예컨대 퇴계와 율곡의 제자들은 두 스승의 부부생활을 매우 궁금하게 여겼다. 그런데 율곡은 밤에도 의관을 차리고 부인을 대했지만 퇴계의 부부생활은 난잡했다. 제자들이 “어..
간신이 들끓는 이유 “세상에 간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世未嘗無姦臣也). 임금이 간신의 술수에 빠지면 나라는 패망하고 만다.” 편찬자들이 ‘간신열전’(사진)을 쓴 이유다. 간신은 언제나 똬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지만 군주가 똑똑하면 절대 발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나라 현종은 초기에는 명재상을 잇달아 기용함으로써 ‘개원지치’의 태평성대를 이뤘다. 특히 한휴 같은 재상은 황제가 조금이라도 엇나간다 싶으면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몸이 바싹바싹 마를 정도였다. 보다 못한 측근이 “귀찮은 한휴를 몰아내면 좋지 않으냐”고 건의했다. 그러나 현종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닐세. 짐은 말랐지만 백성은 살찌지 않았는가.” 그러나 초심을 잃은 현종의 말년엔 간신이 득실거렸다. 예컨대 현종이 안록산의 뚱뚱한..
천세, 구천세, 만세 명나라 환관 위충현(?~1627)의 세도는 황제(희종)를 능가했다. 황제의 권력서열이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곽씨) 다음인 ‘넘버 3’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위충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 ‘만세(萬歲)’ 구호였다. 그래서 고심 끝에 ‘구천세(九千歲)’를 생각해냈다. 위충현이 거리를 지날 때면 ‘구천세’ 연호가 나왔다. 아부꾼들은 ‘구천구백세’까지 높여 불렀다. 그래도 황제의 존엄을 상징하는 ‘만세’ 구호는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사진은 ‘만세’를 새긴 서진시대 동전) 조선과 같은 제후국 군주에게는 ‘천세’의 구호만 허용됐다. 만세가 황제의 전유물이 되기 시작한 것은 한 무제 때이다. 기원전 109년 숭산(嵩山)에 오른 무제는 어렴풋이 ‘만세삼창’ 소리를 들었다. 산신(山神)이 지른 소리..
안평대군과 ‘소원화개첩’ “안평대군의 글씨가 자연미를 방불케 하니 불세출의 사람이다. 중국의 선비들도 그의 글씨 한 장만 얻어도 가보로 삼았고…”(). 최항(1409~1474)의 극찬은 허언이 아니었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글씨는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한 보물’(
담장을 탈출한 조선의 여성여행가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 조선은 이렇듯 여성들의 나들이까지 쉽게 허락하지 않은 폐쇄사회였다. 그러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충동이 남성만의 전유물인가. 제주의 기녀 출신 거부(巨富)인 김만덕(1739~1812)이 감히 여행을 떠났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1796년 정조는 재산을 풀어 제주 백성들을 구휼한 김만덕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만덕은 “다른 건 다 필요없으니 한양·금강산 여행이나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했다. 임금에게 여행계획서를 제출한 셈이다. 정조는 흔쾌히 소원을 들어줬다. 마침 한겨울이었다. 정조는 봄이 될 때까지 만덕을 내의원 대령의녀로 임시발령하는 특전을 내렸다. 봄이 되자 정조는 만덕의 발길이 닿는 각도 관찰사들에게 음식과 경비를 대주라는 특..
‘못생긴 남자’의 대명사 오징어 오징어의 이미지는 고금을 통틀어 좋은 편이 못된다. 우선 오징어의 어원이 ‘까마귀 도적’, 즉 오적어(烏賊魚)인 것도 그렇다. ‘물 위에서 죽은 척 둥둥 떠있다가 까마귀가 달려들어 쪼는 순간 잽싸게 낚아채는 동물’이라는 것이다(·사진). 다산 정약용은 사악한 오징어와 고고한 백로가 등장하는 동물우화시를 읊었다. 이 시에서 오징어는 백로에게 “자네나 나나 물고기를 잡아먹는 건 마찬가진데 뭐 그리 청백한 척 하얀 자태를 드러내느냐”고 한껏 비아냥댄다. 그러자 백로는 “상관 마라. 난 더럽히지 않고 꼿꼿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응수한다. 이에 오징어는 “멍청한 자야. 굶어죽기 십상이구나”하고 저주한다. 다산은 오징어가 먹물로 바다를 흐리게 해서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비겁자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다산 스스로 ..
고려시대 8학군 중국 베이징 뒷골목 원창(문창·文昌) 지역의 쪽방(11.4㎡)이 10억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3.3㎡당 2억8000만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집값이다. 주변에 중국 최고의 명문이라는 베이징 제2실험초등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문창’이라는 지역 이름도 중국인들의 ‘맹모삼천’을 부추겼다. 도교에서 문창제군은 ‘공부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북쪽엔 공자, 남쪽엔 문창’이라 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공신’이다. 중국인들은 문창제군을 모신 사당에 기도한 뒤 과거를 치렀다. 베이징의 원창(문창), 강남의 대치동 같은 이른바 ‘교육특구’는 고려시대 때도 있었다. 1055년(문종 9년) 해동공자 최충이 사학(문헌공도)을 세운 개경 송악산 아래의 자하동(사진)이다. “자하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