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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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대국민 사과성명’ “내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병자·정묘년의 변란을 당했다. 백성들이 아무리 날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다.” 1641년 인조 임금이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당시 병자호란 항복문서에 따라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도망쳐나온 조선 백성들을 다시 돌려보내야 할 딱한 처지에 놓였다. 전국이 눈물바다에 빠졌다. 인조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책임감을 통감한다”고 자책했다. 2년 뒤인 1643년 대사간 유백증은 심상치 않은 상소문을 올린다. “천재지변도, 흉년도, 인심의 이반도 광해군 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래도 광해군 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전하는 뭡니까. 세 번(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나 환란을 겪지 않았습니까.” 인조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한마디가 있었다. “이 지경이..
‘독립문’ 글씨는 이완용 작품 “독립문 세 글자는 이완용이 쓴 것입니다(사진).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동아일보 1924년 7월15일) 독립문 편액이 매국노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1896년 미국명 필립 제이슨(서재필)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 자리에 파리 독립문을 세우기 위해 발기인 모임 격인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이완용은 부위원장직을 맡아 100원을 기부했다. “일본과 청국의 싸움 끝에 조선이 독립국이 됐고, 영은문의 자리에 독립의 주춧돌을 세워 수치를 씻어야 한다”(독립신문 1896년 6월20일)고 설립취지를 밝혔다. 독립문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독립신문은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우리 대한의 독..
금테 두른 신라의 호화저택 “신라 전성기 경주엔 금입택(金入宅)이 35곳(실제 39곳) 있었다.”( ‘기이·진한조’) 신라 왕경인 경주에 황금이 집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그야말로 금테 두른 호화저택이 40곳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실제 “(금입택인) 수망택에 황금이 홍수처럼 들어갔다”()고 한다. “신라 재상이 거느린 노동(奴)은 3000명이고, 갑옷 입은 병사와 가축의 숫자도 그만큼이었다”( ‘열전·신라’)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헌안왕은 860년 수망택과 이남택에게 ‘보림사에 황금 160분, 벼 2000곡을 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평소 존경했던 스님(체징)을 위해 돈 좀 내라’는 정식 요청이었다지만 과연 그럴까. 금입택 재력가들은 ‘강요된 기부’로 여기지 않았을까. 39 금입택 중의 으뜸은 김유신가의 ‘재매정택(사적..
백제 구구단 목간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 2011년 6월 사비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쌍북리 주택 신축공사장에서 숫자가 새겨진 목간 1점(사진)이 수습됐다. 처음엔 문서나 물건 등을 보내면서 단 물품 꼬리표인 줄 알았다. 5년 뒤인 2016년 1월16일 한국목간학회가 주최한 발표회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목간의 적외선 촬영 사진을 지켜보던 목간학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저거, 구구단표야. 구구단 목간이 틀림없어.” 당시 학회 섭외이사였던 이병호씨(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는 사진파일을 받아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과 함께 숫자의 패턴을 찾아갔다. 9×1=9, 9×2=18… 뭐 이런 식이 아니라 9×9=81, 8×9=72, 7×9=63…으로 나가는 구구단이었다. 1×2, 1×3… 등은 생략했다. 무엇보다 각 단마다 ..
‘닭대가리’를 위한 항변 흔히 머리 나쁜 사람을 ‘새대가리’ ‘닭대가리’라 놀린다. 서양인들도 ‘Birdbrain’이라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인들이 새와 닭을 폄훼한다면 그것은 누워 침뱉기 격이다. 왜냐. 혁거세(신라)·주몽(고구려)·수로(가야) 등이 모두 난생신화의 주인공들이다. 동이계는 원래 새를 숭상하는 종족이었다. 닭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우물이 바로 계정(鷄井·나정)이다. 부인 알영은 같은 날 계룡(鷄龍)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알영의 입술은 닭부리 같았다. 사람들이 월성의 북천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튕겨져 나갔다. 둘은 13살 때 결혼해서 남해차차웅(재위 4~24년)을 낳았다. 경주 김씨를 비롯한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어떠한가. 기원후 56년 금성(경주)의 서쪽 숲에..
테러 당한 백제인골 1983년 5월25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 사이의 도로 공사장을 찾았던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원 교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목격한다. 백제왕릉이 확실한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간 현장을 보았다. 3호분 동쪽 15m 지점, 포클레인 삽날로 잘린 단면에서 백제 옹관과 함께 백제인의 갈비뼈와 다리뼈 등 인골이 노출돼 있었다. 개발에 눈이 멀어 자행된 무자비한 테러, 즉 역사 파괴의 현장이었다. 이 교수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행정기관에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언론의 힘에 기대기로 했다. 언론 보도와 학술대회가 이어졌다. 2년간의 기나긴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85년 석촌동 고분을 중심으로 한 백제유적 정비계획이 수립됐다. 3~4호분 사이를 관통한 백제고분로는 지하도로 바뀌었고,..
‘청와대’ 풍수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1990년 청와대 경내의 북악산 기슭에서 표석 하나(사진)가 발견됐다. 예부터 청와대터가 천하제일의 명당이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한 말년을 두고 청와대 풍수가 좋지 않다느니 하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전임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기(氣)가 서쪽으로 빠져나간다’고 해서 청와대 현관을 서향에서 남향으로 바꿨지만 백담사로 ‘유배’당하지 않았던가. 마침 조선총독의 거처였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청와대 본관 및 관저를 분리하고 신축하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좋은 조짐의 표석이 발견됐으니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청와대터는 길지 중 길지였다. 고려의 3경 중 하나인 남경의 궁궐이 있었던 곳이니까…. 1096년(숙종 원년) 김위제는 를 인용..
우박은 하늘의 재앙 중국 장쑤(江蘇)성 옌청(鹽城)시에 탁구공 크기의 우박을 동반한 토네이도가 휘몰아쳐 10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박이 떨어지면 속절없이 1년 농사를 망치니 하늘이 내리는 ‘하얀 재앙’이라 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본다(民惟邦本 食爲民天)’는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예로부터 지도자는 우박이 내리면 ‘내 탓이오’를 외치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하늘에 용서를 빌어야 했다. 연산군도 초창기에는 제법 현군의 풍모가 엿보였다. 1497년(연산군 3년) 우박이 쏟아지자 홍문관 부제학 이승건은 “전하는 아집을 버리고… 공론을 따르시어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라”고 서슴없이 질타한다. 1499년 다시 우박이 내리자 연산군은 “변변치 못한 과인이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