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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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미인’, 그녀는 누구인가 최근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사진)’가 보물 제1973호로 지정됐다. 새삼 자료를 뒤져보니 ‘미인도’는 혜원이 붙인 게 아니라 후대의 제목이었다. 적당치 않은 제목이다. 그냥 ‘미인도’라 명명하는 순간 개별 작품의 독자성을 잃고 미인 즉 ‘아름다운 여성의 일반적인 범주’로 갇히고 만다.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혜원의 ‘이른바 미인도’는 과연 누구를 모델로 그린 것일까. 이구환(1731~1784)은 “혜원은 ‘동가숙서가식’ 떠도는 화가였으며, 방외자(국외자)로서 여항인(중인·서얼·평민) 틈에서 살았다”고 했다. 오세창(1864~1953)은 “혜원의 관직이 첨사(무관직)였다”()고 전했다. 각 병영에 파견되어 군사지도 등을 제작한 화가였을 가능성이 있다. 18~19세기 기방(..
임진왜란 ‘항왜(降倭) 열전’ 임진왜란 때의 항왜(항복한 왜인) 중에는 사야가(沙也加)가 유명하다. 사야가는 부산포 상륙 즉시 ‘동방예의지국(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귀화했다. 조선은 사야가에게 ‘김충선(金忠善)’의 이름을 하사했다·사진). 김충선뿐일까. 1597년(선조 30년) “일본군 진영은 1만명에 이르는 항왜 때문에 크게 낙담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중 으뜸은 여여문이다. 선조는 “여여문은 보통 왜인이 아닌데, 병이 들었다 한다. 특별히 후대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왜일까. 여여문은 아동대(兒童隊)의 검술과 사격술을 지도하는 책임자가 됐다. 지도한 50명 중 17명의 아동이 합격했다. 여여문은 매복유인술 등 왜군의 전술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적진의 왜장을 죽이는 암살작전까지 제안했다. 여여문은 특히 ‘우리(我) ..
현충사 현판과 ‘완물상지’ “시중에 임금의 글씨를 한껏 치장해서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풍조가 일고 있습니다.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1492년(성종 23년) 대사헌 이세좌의 상소문이다. “임금이 고작 서예 같은 하찮은 기예를 자랑하는 게 될 말이냐”면서 “제발 자중 좀 하라”고 꼬집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만 영돈녕(종친부 업무를 관장하는 종1품)에게 몇 점 내렸을 뿐인데, 이게 유출된 것인가.” 성종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경은 어디서 (내) 글씨를 보았다는 거냐”고 발뺌했다. 이세좌는 굴하지 않고 “신승선·윤은로·윤여림의 집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증거를 들이댔다. 아니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면서, 글씨 잘 쓰는 것이 무슨 허물인가. 하물며 지존인 임금이 ‘명필 자랑’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건가. 이 대목에서 이세..
‘영구결번’ 국보·보물 열전 주로 스포츠나 항공기, 철도 등에 쓰이는 ‘영구결번’이 국보와 보물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국보 274호와 278호가 그렇다. 국보 274호(거북선별황자총통·사진)는 1992년 해군의 해전유물발굴단이 한산도 해역에서 인양한 유물이었다. 총통에는 ‘거북선의 총통은…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一射敵船必水葬)’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가 발견됐다니 난리가 났다. 긴급문화재위원회가 단 3일 만에 국보 274호로 지정했다. 성분 분석 결과도 나오기 전이었고 문화재위원회에 무기전문가도 없었지만 만장일치 통과였다. 그러나 1996년 이 총통이 가짜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진급에 눈이 먼 발굴단장(황대령)이 철물업자가 제작한 가짜총통에 명문을 새긴 뒤 한산도 해..
취리산 회맹은 흑역사인가 “665년 8월 문무왕은 당나라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취리산(공주·사진)에서 회맹했다.” 이것이 가 전하는 당나라의 주도 아래 신라-백제의 취리산 회맹 기사이다. 문무왕과 부여융은 제사를 지내고 제물(흰말)의 피를 마셨다. 양측은 “당나라의 번국(제후국)으로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조약문을 황금으로 새겨넣은 철판에 기록했다. 이 회맹에는 탐라와 왜의 사신들까지 증인으로 참석했다. 문무왕은 왜 백제 의자왕의 맏아들인 부여융과, 그것도 백제가 망한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맹약을 맺은 것일까. 복잡한 사정이 있다.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할 때 당태종은 “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백제땅은 모두 신라에 넘기겠다”고 밀약했다. 그러나 660년 백제 의자왕이 ..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세종에게 ‘숨겨진 업적’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바로 실록 등 역사서를 보관하는 사고(史庫)의 확충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사고는 서울(춘추관)과 충주 등 2곳에만 있었다. 그러나 1439년(세종 21년) “실록과 고려사 등을 여러 곳에 나눠 보관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상소를 세종이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성주와 전주에도 사고를 마련해 각종 역사서를 보관했다. 이것은 세종대왕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신의 한 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성주와 충주, 춘추관 사고가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마저 불탄다면 태조~명종 사이 조선 전기의 역사는 물론 고려사 전체가 공백으로 남을 판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전주의 실록을 지켜..
공자님도 먹었던 김치 김치의 원형이 ‘절임채소’라 한다면 동양의 성인인 공자도 김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롤모델’인 주 문왕이 창포저(昌蒲菹·창포로 만든 절임채소)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찡그려가며 ‘창포저 먹기’에 도전했다. 그러나 얼마나 시었는지 3년이 지나서야 익숙해졌다(). 중국의 김치는 공자마저도 3년이 지나서야 겨우 적응할 정도로 신맛이 강했다. 주로 초산발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분을 분해하는 젖산발효로 만들어진 우리네 김치는 은은하고 달콤한 신맛을 낸다. 한반도의 김치가 기층문화로 자리 잡은 이유이다. 오죽하면 임금(광해군)에게 김치를 바쳐 재상에 오른 아첨꾼들을 일러 ‘침채재상(沈菜政丞)’이라는 세간의 비아냥이 나왔겠는가. 김장문화의 첫 기록은 이규보(1168~1241)의 시(‘가포육영..
정선과 이병연의 ‘콜라보’ “자네와 나는 합쳐야…되는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다 허둥대네.…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럽네.” 1740년 사천 이병연(1671~1751)이 양천현감으로 떠나는 겸재 정선(1676~1759)에게 보낸 이별시다. 지금으로 치면 멀지도 않은 양천구청장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이별이 원망스럽네. 어쩌네’ 하는 것이 좀 ‘오버’인 듯싶다. 하지만 평생지기 ‘베프’였던 천재시인과 화가의 브로맨스를 안다면 이런 호들갑쯤은 이해할 수도 있다. 5살 차이인 두 사람은 서촌(서울 청운동 옥인동 일대)에서 나고 자랐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 정선보다 덜 알려졌다. 그러나 당대의 평가로는 ‘그림은 정겸재, 시는 이사천’ ‘좌사천, 우겸재’였다. 사천은 평생 1만3000~3만수의 시를 지은 다작시인이었다. 시를 지을 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