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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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아들의 쇼생크 탈출 “폐세자 이지가 70자(21m) 길이의 땅굴을 파고 탈출했다가 잡혔습니다.” 1623년 5월22일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의 아들 부부를 위리안치(가시덤불로 둘러싼 집에 가둔 유배형)한 강화 교동에서 급보가 올라왔다. 폐세자가 가위와 인두로 26일간이나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조선판 쇼생크 탈출이었다. 나무 위에 올라가 탈출 장면을 지켜보던 폐세자빈 박씨는 3일간 곡기를 끊은 뒤 목을 매어 죽었다. 조정은 벌집 쑤셔놓은 듯했다. 반정공신들은 “폐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앙앙불락했다. 인조와 이원익 등 일부 신료가 “골육 간 참변이 더는 없어야 한다”며 변호했지만 소용없었다. 폐세자는 ‘자진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잡은 금부도사가 도착하자 의연한 웃음을 지었다. 폐세자 부부의 나이는 둘 다..
1577년, 100일간의 언론자유 “과인이 우연히 (활자로 인쇄된) 조보를 보았다. 누가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만들었는가.”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길길이 뛴다. 조보는 행정업무 사항을 알려주는 일종의 관보다. 중앙이나 지방 관청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열람해왔다. 그런데 약 100일 전인 8월부터 서울의 ‘직업 없는 식자들’이 의정부의 허락을 얻어 조보를 인쇄하여 구독료를 받고 배포하기 시작했다. 율곡 이이의 는 “조보를 받아본 독자(사대부)들이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했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선조는 “누가 감히 이 따위로 일을 처리했냐”면서 “조보를 인쇄하고 유료로 배포한 자들과 이를 허락해준 자를 색출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조보를 발행한 30여명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보다 못한 사헌부가 “그들은 고의..
청동기 ‘노출남’의 정체 1970년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골동품상이 찾아와 녹슨 청동제품을 내밀었다. 밑부분이 부러져 나갔고, 그나마 남아 있는 윗부분마저 둘로 절단돼 있었다. 게다가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에는 보기 드문 기원전 4~3세기 청동유물이어서 싼값에 구입했다. 그런데 녹을 벗겨내자 반전이 일어났다. 놀라운 무늬가 보였다. 두 개의 Y자형 무늬 끝에 새 한 쌍씩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솟대’가 떠올랐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서 나무와 새가 아닐까. 다른 면에서는 항아리에 곡식을 담고 있는 여성과 괭이를 치켜든 인물이 보였다. 더 놀라운 그림이 보였다. 벌건 대낮에 떡하니 성기를 노출한 채 따비(쟁기)로 밭을 가는 남성상이었다. 뒷머리엔 긴 깃털장식을 뽐내면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
사람 제사의 비밀 “서울의 왕자·옹주가 새집을 지으면서 어린아이를 생매장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조선조 성종의 치세(1493~1494년)에 해괴망측한 유언비어가 퍼졌다. 땅의 기운을 다스리려고 아이들을 납치해서 생매장한다는 것이었다. 소름 끼치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경기·황해·충청도까지 아이를 업은 부모의 피난 물결로 몸살을 앓았다. 엄청난 유언비어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무신정권의 실세인 최충헌의 저택을 지을 때와, 충혜왕이 궁궐을 세울 때도 “동남동녀를 잡아 오색옷을 입혀 건축물의 네 귀퉁이에 묻는다”든지, “아이 50~60명을 궁궐의 주춧돌 아래 생매장한다”든지 하는 소문이 파다했다. 조선조 중종이나 명종 연간에도 사람 제사와 관련된 유언비어가 창궐했다. 사람을 제사의 희생물로 바친 역사는 뿌리 깊다. 하늘신..
김천택과 19금 노래 “내 일러줄 거야. 네 남편한테…. 건넌집 김서방 불러내…수군수군 말하다 … 삼밭으로 들어가 … 잔삼은 쓰러지고 … 굵은 삼대 끝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고…. 내 꼭 이를 거야. 네 남편한데….” 유부녀의 불륜행각을 남편한테 고자질하겠다는 협박인데, 저 생생한 표현을 보라. 김천택의 ‘만횡청류’에 등장하는 노래이다. ‘약간 높은 음으로 흥청흥청 부른다’는 뜻의 만횡청류는 농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노래다.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 … 가는 허리 자늑자늑 빨간 치마 걷어올리고….”(사진) “반여든에 처음 계집질하니 … 흔들흔들 이 재미 알았던들…” 하는 의성어·의태어가 난무하는 노랫말이 적지 않다. 짝사랑 총각의 불타는 마음을 표현한 노래도 있다. “각시네 옥 같은 가슴팍을 좀 대어볼 수 있을까. … (여..
간송과 야마나카의 문화재 전쟁 일제강점기에 야마나카(山中) 상회라는 고미술 무역상이 있었다. 뉴욕(1894년)에 이어 보스턴, 시카고, 런던, 파리, 베이징 등에 지사를 둘 만큼 세계적인 골동품 거상이었다. 이 거대자본과 3차례 맞서 2승1패의 성적을 거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간송은 1933년 야마나카 상회가 주최한 경매에 나서 쓴잔을 마신다. ‘불국사 전래’라는 통일신라 3층 석탑(6000원) 등 석조물 3점을 1만2750원에 낙찰받는다. 그러나 훗날 이 석탑의 연대가 고려시대로 판명돼 서울시 유형문화재(제28호) 지정에 그쳤다. 1934년 간송은 오사카에서 야마나카 상회의 대표인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1866~1936)와 담판을 벌인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30점을 구입하고자 한 것이..
뒤바뀐 보물, 원통한 사연 ‘보물 454호 금팔찌(노서리 215번지)-455호 금귀고리(황오동)-456호 금목걸이(노서리 215번지)….’ 지정문화재 ‘보물’ 목록을 살피면 좀 이상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한곳의 출토지에서 나온 국보·보물 문화재를 등록할 때 일련번호를 붙인다. 그런데 노서리 215번지 유물이 등록된 보물 454~456호 사이인 455호에 생뚱맞은 유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황오동 금귀고리다. 무슨 연유일까. 1933년 경주읍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김덕언은 자기집 토담을 따라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갈다가 금제품들을 수습했다. 금귀고리 1점, 은팔찌 1쌍, 금·은반지 각 1점씩, 금구슬 33알이었다. 유물을 본 일본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쌍이어야 할 귀고리가 왜 1점뿐일..
고종의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고종)황제에게 비보(秘報)를 보고할 때는 묵서 대신 화학비사법을 써서 기밀을 유지하라.”(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발굴한 의 내용이다. 이 책은 1902년 고종 황제가 지금의 국정원 격인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를 설립하면서 만든 총 23개조의 황제어람용 비밀 규정집이다. 제국익문사 요원들은 정부 고관대작과 군영 장관의 동향을 파악했다. 특히 ‘일본의 정당과 낭객, 수비대와 헌병대’는 요시찰 대상이었다. 친일파와 일제를 타깃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61명의 요원 중에는 9명의 해외통신원까지 포함돼 있었다. 비밀조직이었으므로 이들이 실제 활동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인 나라사키(楢崎桂園)의 책 에 수상쩍은 대목이 있다. “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