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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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미투’ 사건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성균관 대성전에서 거행되는 공자 제사를 위해 목욕재계 중이던 성균관 유생 최한경이 ‘홀랑 벗은 몸’으로 동료 정신석과 함께 지나던 부인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은 “유생들은 울부짖는 여종 2명을 쫓아냈고 반항하는 여인을 힘으로 억눌렀으며, 부인이 쓰고 있던 갓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 집 사내종이 성균관에 정식으로 이 사건을 고했다. 그러나 성균관의 자체조사에서 사내종의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홍여강이라는 사대부집 미혼의 여주인’에서 ‘주인집 유모의 딸’로, 끝내는 ‘사대부의 비첩’(여종 신분으로 양반집 첩이 된 여인)이라고 했다. 가해자들은 “성희롱만 했을 뿐”이라고 혐의사실을 일부 인정하는 선에서 진술했다. 그런데 은 흥미..
세종의 ‘소외계층’ 인권정책 “출산 휴가 100일로는 부족하다. 산전 휴가 1개월을 더 보태라.” “산모에게만 휴가를 주었더니 안되겠다. 남편에게도 30일간 휴가를 주어라.”(사진) 꼭 요즘 시대 복지정책 같지만 놀라지 마라. 이것은 600년 전 조선조 세종이 관노비와 관노비 남편에게 베푼 출산휴가다. 세종은 갓난아기와 산모를 위해 출산휴가를 내렸고, 덧붙여 ‘산후조리와 아기관리는 산모와 남편이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라며 남편의 출산휴가까지 내린 것이다. 세종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노비는 천민이지만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외계층을 향한 세종의 따사로운 시선은 죄수들에게까지 미친다. 세종은 “감옥은 죄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다”라면서 재소자 인권을 위해 반드시 준수해야 할..
‘짝퉁설’에 박탈당한 국보의 지위 경기 양평 용문산 상원사 앞마당에 고색창연한 동종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보호각만 있을 뿐 보호틀도 없는 그런 종이다. 이름하여 양평 용문산 상원사 종(사진)이다. 유명한 강원 평창 오대산 상원사 종(국보 제36호)과는 다른 ‘동명이종’이다. 그러나 이 양평 상원사 종도 한때는 ‘신라와 중국의 양식을 절충한 진귀한 종’이라는 찬사와 함께 일제강점기인 1939년 보물로 지정된 바 있다. 해방 이후 국보(제367호) 대접까지 받았다. 그러나 1962년 문화재 재지정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황수영 문화재위원(동국대 교수)이 ‘짝퉁설’을 제기한 것이다. “1907~1908년 상원사에 있던 종을 800원을 주고 사들여 서울 남산 밑에 조성한 일본 사찰(동본원사)로 옮기면서 진짜는 ..
“주류성을 잃었구나!” “660년 9월 복신 등 백제인들이 이미 망한 나라를 일으켰다.”()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것은 660년 7월이었다. 그러나 원로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 30살 장수 흑치상지 등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부흥군을 일으켰다. 10여일 만에 3만명이 모였고, 지방 200여성이 호응했다. 661년 9월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 백제부흥군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에 주력하고, 신라는 당나라군을 위한 보급전쟁에 뛰어든 시기여서 백제땅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662년 7월 당나라가 장악한 백제땅은 고작 웅진성(공주) 정도였다. 당 고종은 웅진도독 유인궤에게 “정 여의치 않으면 본국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명까지 내렸다. 하지만..
다시 새기는 윤봉길 의사의 유언 “이 시계는 제게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 시계가 낡았으니 제 것과 바꾸시죠.” 1932년 4월29일 아침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虹口) 거사를 위해 6원을 주고 구입한 ‘신상 시계’를 백범 김구의 낡은 시계와 바꾸었다. “저에겐 그저 1~2시간밖에 소용없는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자동차에 오르던 윤 의사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6~7원을 꺼내더니 백범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돈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백범은 출발하는 자동차를 향해 팔을 내저었다. “윤 동지! 지하에서 봅시다.” 오전 11시50분쯤 3만명의 상하이(上海) 주재 일본군 및 거류민이 참석한 훙커우 공원의 천장절(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장에서 폭발음이 퍼졌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이 터져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이다. 내장이 쏟아진 일..
조선 최고의 ‘순간포착 캡처’ 흔히 풍속도의 계보는 김홍도(1745~?)-신윤복(1758~?)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에 또 한 사람의 대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김홍도보다는 9살 아래, 신윤복보다는 4살 위인 긍재 김득신(1754~1822)이다. 전형적인 ‘낀 세대’다. 더욱이 주제와 소재가 김홍도를 빼닮았다는 이유로 ‘김홍도 따라쟁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김득신은 큰아버지와 동생, 아들, 손자, 동생의 아들과 손자, 외가 등에서 5대 20여명의 화가를 배출한 개성 김씨 출신이다. 시쳇말로 조선시대 ‘팀킴’ 화가가문이다. 정조(재위 1776~1800)는 “김홍도와 김득신은 백중(伯仲)한 화가”라 평가했다. 특히 ‘파적도(破寂圖)’는 18~19세기 조선의 시골집에서 벌어진 일대 사건을 순간포착해서 ‘짤’로 남..
조조의 가짜무덤설 “조조는 죽기 전에 가짜무덤 72개를 만들라고 명하면서 ‘누군가 무덤을 파헤칠까 두렵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원말명초의 인물인 나관중의 가 묘사한 조조(155~220)의 최후이다. 의심 많은 조조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을 속이는 ‘간적’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대표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조조보다 약 70년 뒤의 인물인 진수(233~297)의 는 “조조는 비범한 사람이자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었다(非常之人 超世之傑)”고 극찬했다. 소설, 그것도 후대의 작품인 보다 거의 비슷한 시기, 그것도 와 에 버금가는 정사인 기록을 믿어야 할 것이다. 특히 검약은 조조의 으뜸 덕목이었다. 조조는 죽기 전 “척박한 땅에 묻고 봉분을 높이 쌓거나 나무를 심지 말고 황금이나 옥 같은 진귀한 보물을 넣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호성공신이 된 ‘마부’ “너는 임금의 어가에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세웠노라.” 최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일본 교토대(京都大) 부속도서관에서 찾아낸 ‘오연의 호성공신교서’(사진) 중 한 대목이다. 호성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년)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 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내린 증명서다. 이번에 찾아낸 교서는 선조의 말(어가)을 끌고 관리한 마부 오연에게 내린 것이다. 선조는 오연과 같은 마부 6명은 물론, 내시 24명과 의관 2명, 별좌 및 사알 2명 등 천대받던 계층의 사람들을 무더기로 공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엄밀히 말해 ‘사상 최악의 논공행상’이라는 혹평을 들을 만하다. 선조는 “그저 명나라 군대의 뒤만 쫓아다녔을 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