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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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선배 ‘민인생 홍여강’ “ ‘사관 위엔 하늘이 있다’고 한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직필 전통을 계승하고….” 최근 28개 역사 관련 학회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에서 언급한 ‘사관 선배들’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조선조 태종시대 사관 민인생과 홍여강이었다. 7~9품에 불과한 전임사관이어서 그런지 두 사람의 이름은 포털사이트 인물 검색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느 날 태종이 매 사냥 때 온종일 임금의 곁에서 찰거머리처럼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던 민인생에게 “뭐하는 자냐”고 쏘아붙였다. 민인생은 “사관의 직무를 다하는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태종이 ‘사관은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명을 내렸지만 민인생은 듣지 않고 들이닥쳤다. 태종이 역정을 내자 민인생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의 교훈 류성룡은 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 “실록 편찬자가 류성룡을 비방하고 배척했다”(). “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통탄스럽다”(). 과 에 나오는 상반된 인물평이다. 광해군대 이이첨 등 대북파가 쓴 과, 인조반정 후 34년에 걸쳐 고친 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정권의 입맛대로 이렇게 정반대의 포폄(褒貶)이 이뤄지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사실 은 처음부터 부실논란을 겪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사관들이 사초책을 불태우고 줄행랑치는 바람에 선조 즉위년(1567년)~임란 발발(1592년) 사이의 기록이 몽땅 사라졌다. 게다가 을 편찬한 기자헌·이이첨 등 대북파가 사필을 움켜쥐고 자화자찬에 열을 올리면서, 한편으로는 명망대..
조선왕실의 태교법 “스승이 10년 가르치는 것보다 어미가 배 속에서 10개월 기르는 게 더 낫다.” 1800년(정조 24년) 사주당 이씨(1739~1821)가 (사진)에서 설파한 태교의 중요성이다. 태교의 시기는 ‘임신 3개월부터’라 했다. 1434년(세종 36년) 노중례가 편찬한 은 “임신 3개월이 되면 형상의 변화가 시작되고 느낌에 따라 감응을 일으키게 되어 태아가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나 지금이나 뇌세포가 대부분 완성되는 임신 3개월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또 성품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3개월 때 임신부가 그릇된 음식을 먹고, 그릇된 언행을 하면 아기가 포악해지고 목숨이 짧아진다고 경고했다. 율곡 이이의 는 디테일한 태교법을 일러주고 있다. “옆으로 누워 자지 않고, 비스듬히 앉지..
기생 화대와 애국기 헌납 “회현동 기생 일동은 매달 하루의 공휴일을 반납하고 그날 영업한 화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낼 것을 결의하고….”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9월23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막힌 기사이다. 기생들은 휴일까지 반납하고 번 한달치 화대 2350원을 헌납했다는 것이다. 2년 전인 1937년 8월21일에도 기가 찬 기사가 실린다. 황해도 기생양성소가 애국기 ‘황해호’ 헌납을 위한 연주대회를 열어 순익금 122원66전을 헌금했다는 내용이다. 예비 기생들의 연주회에 동아·조선일보 지국이 후원까지 했다고 한다. 일제가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애국기(군용기) 헌납을 중심으로 벌인 국방헌납운동의 광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코흘리개 아동들까지 동원, 학용품이나 일본된장을 판 수익금까지 헌납했다니까…. 심지어 1937..
[여적]신라임금 이발하는 날 청일전쟁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일본인들이…무덤 속에 금사발이 묻혀 있다던가 혹은 금닭이 운다던가 하는 전설을 퍼뜨리며…”( ‘고분발굴만담’, 1932년). 일제강점기에 경주 금관총을 발굴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도굴행각을 개탄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렇게 일본인마저 한숨 쉰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고분들이 있었다. 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사이에 왕경(경주) 안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들이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 덕분이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과 달리 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껍게 쌓은 형태였다. 돌과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령 황남대총 남분의 전체 체적은 4만2291㎥에 이르렀다. 2.5t 트럭 2..
‘난신적자’ 공소시효 “인간의 도리를 해치는 것은 ‘권(權)’이라는 한 글자 때문이다. ‘權’자 때문에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소굴이 된다”( ‘독서차의’). 조선 후기 학자 위백규(1727~1798)는 난신적자, 즉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권세’ 때문이라 했다. 혜강 최한기(1803~1877) 역시 “난신적자는 백성을 잘 다스리기보다는 오로지 부의 축적과 개인의 영달을 좇을 뿐”( ‘용인문’)이어서라 했다. 여말선초 학자 야은 길재(1353~1419) 역시 “난신적자는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서문’)고 했다. 난신적자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다. 1548년(명종 3년) 영의정 윤인경 등은 선왕(중종) 때 국정을 농단했던 김안로의 잔당을 겨냥, “난신적자는 설령 1000년..
[여적]호우총의 이모티콘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 1946 년 5월 경주 노서동 140호 남분(호우총)에서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제작했음을 알리는 명문 청동그릇이 출토됐다. 고구려의 정복군주였던 광개토대왕의 흔적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확인됐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유물이었다. 최근 발굴 69년 만에 보물로 지정된 이 청동그릇의 명문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숨어있다. 마지막 글자인 ‘十’자와, 명문의 윗부분에 비스듬히 새겨진 #자다. # 문양은 한성백제 도읍지인 풍납토성과 고구려 최전방 전초였던 구의동 아차산 4보루 등에서 확인된 토기들에서도 심심찮게 보인다. 十 자의 경우 광개토대왕을 기려 그릇 10개를 만들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분명치 않다. 최근 금관..
석굴암 약탈작전 “석굴암(사진) 전체와 불국사 주조불을 경성으로 옮겨라.” 1909년 어느 날 경주군에 근무 중이던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는 황당무계한 명을 받는다.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뒤 경성(서울)으로 수송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폭명(暴命)이었다. 나(기무라)는 반감이 솟구쳤다. 유적 유물은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역사적 증빙이 되는 것인데….” 이 기상천외한 명은 2대 통감이던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1849~1910)가 1909년 경주 초도순시 때 내린 것이었다. 이 계획은 한일합병 직후까지 이어지다 결국 무산된다.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역시 ‘보물을 산중에 두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며 완전 이전을 추진했다가 악화된 지역민심에 막혀 포기한 것이다. 간신히 현장 보전의 길이 열린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