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강 고집’ 강만수, 벼랑 끝에 서다

이명박 정부 시절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71)은 힘이 셌다. 실세 중의 실세였다. 지금으로 치면 박근혜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감싸기로 국정(國政)을 혼란의 늪에 빠뜨린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 견줄 만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던 강 전 장관은 부작용이 예상되는 경제정책을 밀어붙이기식으로 관철시켰다. 그는 경제주체들과의 소통보다는 자신의 고집을 앞세웠다. 당시 경제관료들 사이에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 장관의 고집 때문에 나라 경제가 결딴날 지경”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경남 합천 출신인 강 전 장관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1970년 행정고시(8회) 재경직에 수석 합격한 뒤 국세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재무부 세제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별명은 ‘강 고집’이었다. 재무부 이재국장을 지낼 당시 장관의 지시를 거부하다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 것도 ‘고집’ 때문이었다.

 

감세론자였던 그는 재무부 세제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1994년 8월22일자 5면·사진)에서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법인세율을 인하하고, 선진국처럼 상속세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책임을 지고 재정경제원 차관에서 물러난 그는 8년간 ‘야인(野人)’ 생활을 했다. 그의 오랜 야인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해준 이가 소망교회를 같이 다닌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이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 시절인 2005년 강 전 장관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에 임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모토인 ‘7·4·7(연간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강국) 공약’의 밑그림을 그렸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서 기획재정부 장관이 된 그는 분배보다는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폈다. 수출 대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성장률을 높이겠다는 의도로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고환율 정책은 물가 폭등을 불렀고, 서민들의 생활고는 가중됐다.

 

그는 또 법인세율과 소득세율을 내리는 세제개편을 단행했다. 대기업과 부유층을 위한 세제개편이란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부자와 서민이 똑같이 재산을 나눠 먹자는 것인데 소련이 그렇게 해서 망했다”고 했다. 그는 장관 재직 시절 “양극화는 시대의 트렌드” “집 없는 사람에게 그린벨트는 분노의 숲과 같다” 등의 발언으로 거센 반발을 샀다.

 

2009년 기획재정부 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을 지냈다. 산은지주 회장 재직 시절 ‘킹(King) 만수’로 불렸던 그는 대우조선해양 경영비리에 관여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지난 2일 그의 서울 대치동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 압수수색 이후 한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검찰 수사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던 그는 “70이 넘은 나이에 10년이 넘는 징역에 해당하는 중죄의 피의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인생이 허무해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사실과 다르거나, 부적절하거나, 과도한 표현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경제관료 시절 그를 키운 건 8할이 ‘고집’이었다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 ‘고집’이 자신을 겨누는 ‘칼’이 돼 돌아온 것은 아닐까.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벼랑 끝이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