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이주노동자 대부’ 김해성 목사의 추락

1996년 6월11일 명동성당 어귀에서 일군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쇠사슬을 목에 감은 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4만원 받는 노예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불법체류자로 쫓기고 도움을 준 사람들마저 구속되고 있습니다.” 불법체류 네팔인 부부의 체포를 막던 목사가 구속되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에 항의하고 나선 것이다. 구속된 목사는 김해성이었다.

 

200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두고 40대 재중동포 한 명이 지하철 선로에 뛰어내려 숨졌다. 그는 석 달 전 입국해 일한 지 일주일 만에 허리를 다쳤는데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의 소지품에서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지폐 몇 장과 함께 명함 한 장이 나왔다. 명함의 주인공은 김해성 목사였다.

 

 

(사)지구촌사랑나눔 이사장 김해성 목사(55)는 ‘이주노동자의 대부’로 불린다. 외국인 노동자들과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신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986년 경기 성남에 산자교회를 개척했다. 노동자 선교를 위해 5월1일 ‘노동자의 날’에 교회 문을 열었다. ‘희망의 전화’를 개설하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 개선, 노조 결성, 임금체불 문제 등을 상담했다. 당시 성남지역 신규 노조의 80~90%가 그 성과물이었다. 김 목사의 삶은 투사에 가까웠다. 아픈 노동자를 보듬고 쫓겨난 노동자를 먹이고 재웠다. 약소자들을 위한 각종 집회에서 경찰에게 많이도 맞았다. 그래서 한때 ‘매 맞는 목사’로 유명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재중동포들에게 그는 ‘마지막 언덕’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성남으로 가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1994년 4월에 창립한 것이 ‘외국인 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이다. 이후 전국에 외국인노동자센터, 외국인노동자교회들을 세우고, 신학대학, 약국, 쉼터들을 속속 열었다. ‘가리봉의 기적’으로 유명한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이주민여성지원센터, 지구촌국제학교 등도 김 목사의 ‘작품’이다.

 

김 목사의 꿈은 원래 부흥사였다. 그런데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이 삶을 바꿔놓았다. 한신대 2학년 때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은 휴교했다. 그는 시위 가담자로 수배 중인 터라 친구 집에 숨어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그 시간에 친한 학우 한 명이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는 자신의 비겁함에 가슴을 치며 신학마저 버리려 했다. 그때 한 목사를 만난다. 성남에서 빈자와 노동자 선교에 온힘을 쏟고 있던 이해학 목사였다. 세상에 이런 목회도 있구나! 그는 이 목사의 사역에 동참했다. 부흥사를 꿈꾸던 목사는 그렇게 ‘불온한 목사’가 되었다.

 

30년 가까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과 지위 향상을 위해 살아온 그는 “진정한 의미의 인권운동가”(2012년 4월23일자 최장집 칼럼)라는 평가를 받았다. KNCC 인권상(1995년 12월15일자), 시민인권상, 인권공적상, 국민훈장 석류장, 청암봉사상 등이 그의 검질기고 슬금한 노력을 인정했다. 그런 그가 성추문에 휩싸였다. 그는 추석연휴 첫날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빕니다’라는 글을 중국동포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곧바로 지웠다고 한다. 참회와 책임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다만, 이 일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낮은 곳을 지키는 이들이 싸잡히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