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DJ 키드’ 김민석, ‘운동권 스타’와 ‘철새정치인’ 사이

“겁 많고 내성적인 내가 험악했던 그 시절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동력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그 애정과 관심을 나를 믿고 고용해준 영등포을 주민들을 위해 온전히 쏟겠습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1980년대 학생운동의 한복판에 섰던 김민석씨(52)가 1996년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서울 영등포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뒤 밝힌 소감이다. 당시 32세였던 그는 당선자 299명 중 최연소였다. 4년 전인 14대 총선 때 28세의 최연소 후보로 나서 경제부총리를 지낸 나웅배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260표 차이로 낙선한 그는 재수 끝에 의원 배지를 달았다.

 

 

당시 ‘김대중 키드’로 불린 그는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방송국 뉴스앵커를 꿈꾸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짓눌린 현실을 겪으며 학생운동의 길로 들어섰고,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학생연합(전학련) 의장에 선출됐다.

 

전학련 의장 시절 경찰이 시위를 막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시켰으나 환자복 차림으로 탈출해 시위를 주도하는 등 매번 경찰의 검거망을 따돌린 일화와 탁월한 연설 솜씨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85년 6월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돼 2년8개월간 수감생활을 한 그는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야권 단일화를 촉구하며 15일간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정계에 입문한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의원 시절인 1999년 아시아의 젊은 정치지도자 20인에 선정(경향신문 10월30일자 13면·사진)됐다. 홍콩에서 발간된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는 그와 함께 당시 추미애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을 21세기에 활약이 주목되는 정치인 20인에 포함시켰다. 2000년에 실시된 16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선의원이 된 그는 성공가도를 질주하는 듯했다. ‘3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2002년 새천년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그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153만표 차이로 패했다.

 

스포트라이트만 받아오던 그에게 ‘철새정치인’이란 낙인이 찍힌 것은 2002년 치러진 16대 대선을 앞두고서였다. 당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탈당한 그는 정몽준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국민통합21로 당적을 옮겼다. 하지만 정몽준 후보가 대선 전날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다. 당 안팎에선 “철새정치인 ‘김민새’를 복당시켜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그는 2008년 11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면서 ‘날개없이’ 추락했다.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정치적 기반도 잃었다. 그는 올해 민주당 대표를 맡아 20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는 지난 18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나 합당을 선언했다. 1999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차세대 정치지도자 20인에 포함됐던 두 사람이 17년 만에 제1야당 대표와 원외정당 대표로 만나 합당을 선언한 것이다.

 

8년 만에 복당한 그는 “스포츠로 치면 2부리그에서 1부리그로 복귀한 셈”이라며 ‘백의종군’의 뜻을 밝혔지만 무게감은 떨어졌다. “정치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말은 어렵사리 ‘1부리그’에 진입한 그가 되새겨야 할 ‘금언’일 듯하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