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돈과의 싸움에서 이긴 ‘벤처기업가’ 정문술

많은 젊은이들이 벤처사업에 뛰어든다. 일확천금의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다 빈손으로 떠난다. 많은 경우 벤처사업을 머니게임으로 착각해 돈놀이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경향신문(1996년 12월24일자 1면)에는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당시 58세)의 기사가 실렸다. 정 사장은 ‘96 얼굴, 기술경영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 기사에서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기업을 일군 집념의 기업인이자 회사 주식을 상장시켜 단숨에 1300억원을 거머쥔 주인공으로 소개됐다. 기사에는 그가 제품 개발 실패로 청산가리를 앞에 놓고 자살을 결심했던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는 기술분야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사업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늦은 나이에 창업해 크게 성공함으로써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더구나 은퇴 후의 행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흙수저’였다. 그는 촌구석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스스로도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으며 영어·수학은 기초가 없어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군대에서 입대하면서 그는 능력을 발휘했고, 육군본부 행정병에서 파격적으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스카우트됐다.

 

1980년대 격변기에 갑작스럽게 해고되면서 그는 새로운 인생과 마주했다. 18년간 일해온 직장에서 쫓겨난 그는 모든 것이 아득했다. 그만 바라보는 5명의 자녀와 순진하기만 한 아내가 있었다.

 

막상 퇴직당하고 보니 동사무소에서 인감증명 떼는 것도 복잡하게 여겨졌다. 그는 창업하기에는 ‘노년’이라고 할 수 있는 46세 때 새 사업에 뛰어들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그는 동업 제의가 들어오자 덥석 받아들였다가 큰 손해를 보았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자 대기업의 갑질이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회사 문을 닫았다.

 

그는 다시 도전했다. 죽기 살기로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예전에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다시 끌어 모았다. 반도체가 가까운 미래에 크게 각광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식으로 반도체 장비회사를 세웠다. 이것이 자본금 8000만원, 직원 6명으로 출범한 미래산업이다.

 

어쩌다 경영인이 된 그의 경영 노하우는 간단했다. 원리와 원칙의 준수였다.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약속을 지켜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솔선수범’ ‘희생’ 등을 교본으로 삼아 경영했다. 그의 경영스타일에 대해 주변에서는 “세상물정을 모른다”거나 “융통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거꾸로 경영’으로 그는 성공했다.

 

그는 기업은 자신이 창업했을 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경영권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위탁된 권력을 가문의 권력인 양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는 “대물림은 없다”며 카이스트에 두 차례에 걸쳐 515억원을 기부했다.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다. 그는 최근 <나는 미래를 창조한다>는 회고록을 냈다. 누군가는 그를 “돈과의 싸움에서 이긴 경영자”라고 말했다.

 

박종성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