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번뇌의 불’ 끄고 ‘성찰의 불’ 지핀 현각 스님

“일본 불교는 경직돼 있습니다. 중국은 종교가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 수행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한국 불교는 생활 속에 살아 있어요. 대단히 깊고 심오합니다.” 21년 전, 현각 스님은 한국에 온 이유를 한국 불교가 세속을 떠나 ‘진리의 숲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경향신문 1995년 11월14일자). 가족과 연인, 안락한 미래를 포기하고 이 멀고 먼 이국땅 절간으로 찾아든 그는 최소한 10년간은 이곳에서 수련을 쌓을 작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25년이 흘렀다.

 

현각 스님은 1964년 미국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속명은 폴 뮌젠. 어려서부터 수행자가 되고 싶어 했다. 가톨릭 중·고교를 나와 1983년 예일대에 입학해 서양철학을 전공했다. 인종차별정책을 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투자한 대학과 전쟁을 부추기는 레이건 정부에 분노해 학생운동에도 뛰어들었다. 6개월간 텐트 농성에도 참여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2년간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한 그는 1989년 뉴욕으로 돌아왔다. 하버드 대학원 학비 마련을 위해 취업한 월가 법률사무소에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명문대 출신의 수재들과 놀고 마시는 생활이 매일 밤 계속됐다. 그러나 ‘혼자 밤길을 걷는 외로움’을 떨칠 수 없었다. 신부가 되려고 입학한 신학대학원에서도 근원적인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12월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우연히 숭산 스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스님의 말은 살아있는 언어였다.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메말랐던 가슴에 불꽃이 튀었다.

 

1990년 한국에 가기 위해 휴학했다. 숭산 스님이 있는 화계사에 도착한 폴 뮌젠은 삭발하고 계룡산 신원사에서 묵언 수행하는 등 1년간 용맹정진했다. 부모님의 눈물과 사랑하는 여자의 청혼을 뿌리치고 출가를 결심했다. 대학원을 마친 그는 1992년 육조 혜능을 모신 중국 남화사에서 계를 받고 출가했다. 폴 뮌젠이 ‘현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1996년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2001년 8월에 화계사에서 숭산 스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았다. 이후 현정사 주지와 화계사 국제선원장을 맡았고, 2008년부터 유럽에서 설법을 하고 있다.

현각 스님은 전생에 한국인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고향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한국 사랑을 설명할 때면 늘 하는 말이 있다. “황병기의 가야금 소리와 고속도로 휴게소 뽕짝을 들어보고 정선의 그림을 한 번 보라. 그리고 인사동 찻집의 쌍화차를 맛보고 서편제 CD를 들어보시라.”

 

그런 현각 스님이 한국 불교에 대한 실망감을 몇 마디 던지자 파장이 일었다. 위계적 구조와 차별, 돈 우선 기복신앙, 신자들의 무조건 순종, 장식품이 된 외국인 승려 등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차제에 불교혁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쪽에선 “조계종에 빨대만 꽂고 산 사람” 등 비난을 퍼부었다. 파문이 커지자 현각 스님은 “조계종을 떠난다고 한 적 없다”고 해명했지만 비판을 거둬들이진 않았다.

 

그의 비판은 불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내 종교들이 공통으로 앓고 있는 병이다. 현각 스님의 손가락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가난하면서도 충만한 종교, 맑은 얼굴과 청아한 눈빛을 가진 종교. 그의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 좋을 텐데….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