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특별감찰관 ‘1호 감찰’ 대상자 된 ‘시골 수재’ 우병우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 기사가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최측근인 그를 둘러싼 의혹이 날마다 흘러나온다. 우 수석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우 수석은 196718일 경북 봉화에서 교사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주에서 초··고교를 나온 그는 학력고사 전국 53위 성적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이던 19871024일 경향신문 2면 사법시험 최종합격자 명단(사진)禹柄宇라는 이름을 올렸다. 29회 사시 최연소 합격으로, 시골 수재의 소년 등과였다.

 

우 수석 이름이 경향신문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90228일자 14면이다. 사법연수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는 서울지검 검사로 발령났다. 형사4부에 배속된 우 수석은 그해 1225일에 파출소에 연행된 이를 때려 전치 9주의 상처를 입한 순경과 의경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독직폭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소란 피우는 취객을 제압하려다가 우발적으로 빚어진 일인데다 서로 합의가 이뤄졌다는 이유에서다.

 

우 수석은 민원이 통하지 않는 강한 성격과 저돌적인 수사력, 용의주도한 일 솜씨로 검찰 내에서 인정을 받았다. 서방파 행동대장과 대전 진술파 두목, 이대병원 수련의 임용과정에서 돈 받은 피부과장 등이 그가 구속한 이들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이용호 게이트특검팀 특별 수사관으로 일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사건 수사 땐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헐값 발행에 직접 관여한 일부 인사들을 기소해 공소시효를 정지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였다.

 

대검 중수부 중수1과장 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박연차 로비 사건 수사를 담당했다. 우 수석은 2009430일 대검 11층 특별조사실에서 노 전 대통령을 대면 조사했다. 그의 윗선은 이인규 중수부장, 홍만표 수사기획관이었다. 이때 수사가 과잉·과도했다는 지적이 법조 안팎에서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결말 이후에도 우 수석은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대검 수사기획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20134월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했다. 노 전 대통령 과잉 수사가 발목을 잡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우 수석은 다음달 검찰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2014년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됐다. 단호한 일처리로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한테 신임을 얻었고, 청와대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히게 됐다. 20151월 민정수석실 수석비서관으로 승진했다. 노무현 정부 전해철 민정수석에 이어 2번째 40대 민정수석이었다.

 

한데 우 수석의 승승장구는 거기까지인 듯하다. 최근 처가와 게임업체 넥슨 간 부동산 매매 과정 개입, 수임계 없는 전화 몰래 변론’(경향신문 2016719일자 1면 보도), 아들의 의경 보직 특혜, 처제의 조세도피처 국적 취득, 처가의 농지법 위반 등 각종 의혹이 매일 쏟아지고 있다. 우 수석은 기어이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의 ‘1호 감찰대상자(경향신문 2016726일자 1면 보도)가 됐다. 이번 사태의 결말은 어떻게 결론지어질까.

 

최우규 정치·국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