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산골 출신 이정현, 박근혜의 ‘입’ 거쳐 언론의 ‘입’ 막다

두메산골 소년에서 여권 실력자 복심으로, 척박한 정치 환경을 이겨낸 선량에서 대통령의 으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의 역정(歷程)이다.

 

전남 곡성에서 태어난 이 의원은 국민학교 3학년 때 합동유세를 보고 국회의원이 되는 꿈을 꾸게 됐다. 광주 살레시오고를 거쳐 동국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1985년 전남도지사를 지낸 민주정의당 구용상 전 의원 총선 캠프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민정당 당직자로 특채된 뒤 당료로 잔뼈가 굵었다.

 

 

이정현 의원은 경향신문 1995612일자 13면에 처음 이름을 냈다. 지방선거 광주시의원 후보 명단(사진)이다. 광산구 제2선거구에 민자당 공천을 받아 나왔지만 낙선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노무현 탄핵역풍에 휘청거렸고 광주에는 한 명도 출마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사표를 던지고 패배가 예정된 광주 서을에 도전했다. 그 뒤 낙선자를 위로하는 자리에서 이 의원은 박근혜 당시 당 대표에게 한나라당이 호남을 홀대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달라고 호소했다. 발언을 수첩에 받아적던 박 대표는 그를 당 수석부대변인에 앉혔다. 이후 이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 곁을 내내 지켰다. 2007년 당내 대선 경선 때 박 대통령의 공보특보를 맡았다.

 

박 대통령은 이 의원을 가리켜 그의 말은 한번도 (제 생각과) 다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의원이 박 대통령 복심으로 공식 인정받은 때였다.

 

2008년 총선에서 그는 박 대통령 추천으로 비례대표 배지를 달았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대변인격이라는 역할에 집중했다. 19대 총선에서 광주 서을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낙선했다. 대신 호남몫 당 지명직 최고위원 자리에 올랐다. 그해 대선에서 그는 박근혜 후보 캠프 공보단장이었고, 당선인 비서실 정무팀장을 맡았다. 또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발탁되면서 당·청 가교 역할을 한다. 20136월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파문 이후 청와대 개편 때 그는 청와대 홍보수석이 됐다(경향신문 201364일자 2). 그렇게 또다시 박 대통령의 입이 됐다.

 

20147월 재·보궐선거 때 이 의원은 새누리당 최고위원이라는 직함을 달고 전남의 순천·곡성에서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18년 만에 호남에서 새누리당 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420대 총선에서도 또다시 당선되며 1988년 소선거구제 이후 처음으로 호남에서 보수정당 후보로 재선에 성공했다.

 

당 대표 꿈을 꾸는 이 의원에게 뜻밖의 사건이 닥쳤다. 세월호 참사 당시 보도를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경향신문 201671일자 1)이다.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이 의원은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KBS를 봤다” “온 나라가 어려운데 그렇게 해경과 정부를 두들겨 패는 것이 맞느냐며 해당 기사를 빼라고 말했다.

 

이쯤 하니 다시 궁금해진다. 박 대통령은 그의 말은 한번도 (제 생각과) 다른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 이 의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했던 말들도 마찬가지인가.

 

최우규 정치·국제에디터